이명박 “박근혜 빼고 다 바꿔”
  • 소종섭 기자 ()
  • 승인 2007.09.1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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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 중심으로 당 체제 개편 박차…박 전 대표와의 관계에도 공 들여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웠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멀었다. 얼굴은 밝았지만 맞잡은 손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강재섭 대표를 가운데 두고 만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전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경선이 끝난 지 18일 만이다. 이후보측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이날 만남은 아직 두 사람이 화학적인 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이 공개리에 만난 데 주목한다. 정치권에서 정치인들이 공개적으로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열린 공간에서 의미 있는 얘기를 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자연히 공개적인 만남에서는 의례적인 얘기를 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이 만남 자체에 의미가 있으면서도 한계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두 사람의 ‘화해’와 관련해 박 전 대표에게 선대위원장 등 자리를 주어야 한다거나 지지했던 의원들이 내년 총선 때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을 ‘조건’으로 거론하곤 한다. 그러나 박 전 대표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후보 쪽에서 이런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상황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박 전 대표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을 잘 아는 한 정치권 인사는 “어려울수도, 쉬울 수도 있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이다. 박 전 대표는 어떤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명분을 주어야 한다. 엊그제까지 격렬히 비판했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지지해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주변에서 당장 박 전 대표에게 어떤 행동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개인보다 당이나 나라를 더 생각하는 것이 몸에 밴 박 전 대표는 상황과 명분이 되면 언제든 정권 교체를 위해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두고 화해하는 쪽으로 가닥 잡아
이후보의 한 핵심 측근도 “정권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큰 대의가 있다. 이후보가 진실로 대하면 마음이 통할 것이다. 일각에서 박 전 대표에게 공천 지분을 일정하게 줘야 한다는 주장 등을 하는데 이것은 순리와 상식에 어긋난다. 그런 문제가 표면화하는 순간 둘 다 공멸하는 길로 간다. 내부적으로 긴장 관계가 있을 수 있지만 정권 교체라는 큰 길에서 결국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두 사람의 향후 관계와 관련해서는 외부 변수도 있다. 대통합민주신당이 체제를 갖추면서 ‘이명박 검증’을 본격화할 때 이후보가 이를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른바 ‘도덕성 부비트랩’이다. 만약 이후보가 여기에 걸린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반대로 이후보의 지지도가 더 높아져 기반이 튼튼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외부 상황에 따라 역학 관계가 변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박 전 대표와 화해하는 일은) 제일 중요한 문제다”라는 정두언 의원의 말처럼 이후보측은 진심으로 공을 들이면서 시간을 두고 화해를 도모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최근 들어 이재오 의원 등 이후보 주변 인사들이 부쩍 입조심을 하는 것도 박 전 대표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은 ‘이명박 체제’로 변하고 있다. ‘공룡’으로 불렸던 당 조직이 빠른 속도로 군살을 빼고 있다. 이후보가 내부에 긴장도를 높였다. 말로 ‘변화’를 외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40대 그룹이 ‘이명박 체제’ 핵심 장악
지난 9월6일 발족한 대선 준비팀이 시작이었다. 말로만 나돌았던 간사들의 면면이 드러나자 한나라당 내부는 술렁였다. ‘40대, 실무형’으로 요약되는 인선은 옛 한나라당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이태규(전략기획)·정태근(조직)·곽승준(정책)·진성호(인터넷) 씨 등은 경선 시절부터 이후보 캠프에서 실무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2002년 대선 때 초·재선 국회의원들이 맡았던 자리를 국회의원도 아닌 이들 40대가 차지한 것이다.
한쪽에서는 신선하다는 평가가, 한쪽에서는 ‘대선판이 경선판인 줄 아느냐’는 조롱 섞인 걱정이 동시에 나왔다. 비서실과 공보상황실 역시 40대가 중심을 이루었다. 의원들도 과거 재선 의원 이상이 중심을 이루었던 것과 달리 박형준(대변인)·정두언(대선준비팀장) 등 초선 의원이 ‘이명박 체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자연스레 ‘젊은 한나라당’의 모양새가 갖춰지고 있다.
이런 인선은 이후보 체제의 한나라당이 세 가지 방향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이후보는 한나라당을 이른바 ‘기업형 당 조직’으로 변화시킬 생각을 갖고 있다. 능력과 효율을 중시하는 체계를 갖추겠다는 것이다. 10월 초순 만들 예정인 선거대책위원회도 이런 원칙 아래 구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후보 캠프 주변에서는 인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는 물론 조직적인 측면에서도 중앙 조직을 간소화하고 대신 지역 조직을 강화하는 쪽으로 구조를 변화시킨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현장에 뿌리 박는 영업 조직처럼 당 조직의 골간이 지역에 확고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선 때의 득표력이 내년 총선 공천과 연관될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이와 관련해 한편에서는 걱정하는 소리도 나온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가 정치 문화를 새롭게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에만 주목할 경우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가 갖고 있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통합하는 측면도 보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후보측의 구상에는 이와 함께 또 다른 맥락이 작용하고 있다. 지난 9월6일 이후보측 진수희 의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 상징적이다. ‘대한민국 건국과 근대화를 완성한 보수 세력은 오만과 부패로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어왔다. 국민은 지난 10년간 보수 세력의 혁신을 요구했으나, 우리는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보수 세력의 자기 혁신 능력 부족이라는 현실 앞에서 이후보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주류 진입은 당과 보수 세력의 혁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힘이다.’
한마디로 기존 한나라당의 주류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이미 시작되었다. 한나라당의 중심인 영남에서 지원한 박근혜 전 대표가 경선에서 낙선한 때부터 물꼬가 트였다. 이후보가 수도권의 지지에 힘입어 후보가 되었다는 것은 향후 한나라당의 변화와 관련해 의미가 깊다. 언제이냐가 문제일 뿐, 한나라당 대의원 조직의 골간을 이루는 60대 이상 노령층을 유권자 분포에 맞게 바꾸는 작업은 필연적이다.
이런 흐름은 ‘젊은 보수’로 가시화할 것이다. 이미 이후보 체제의 핵심을 장악한 40대 그룹은 집권 여부에 관계 없이 향후 한나라당의 중심을 이루며 보수의 혁신을 이루어내는 중심추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전반적인 변화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박 전 대표에게 결코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 당의 핵심 지지 기반 자체가 크게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당심을 장악한 박 전 대표 입장에서는 바탕이 허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긴 호흡을 갖고 진행될 이런 흐름을 박 전 대표가 외면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박 전 대표는 당장 어떤 행동에 나서기보다 시간을 갖고 ‘때’를 기다릴 것으로 보인다. 당장 눈앞에 닥친 ‘정권 교체’라는 명제를 외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즉시 이후보에게 협력할 수도 없는 딜레마가 있다.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고, 열쇠는 이후보가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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