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춤이 참 무겁소”
  • 김진령 기자 ()
  • 승인 2007.09.15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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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무용인 살풀이춤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민살풀이춤을 추는 팔순 넘은 두 ‘춤꾼’이 있다. 얼마 후 함께 무대에 오를 두 ‘명무’의 삶과 춤을 비추어본다.

 
전통 공연 연출가 진옥섭씨는 최근 우리 전통 예술가들의 삶을 그려낸 <노름마치>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의 시작은 민살풀이춤을 추는 장금도씨로부터 시작해 85세에 처음 서울 무대에 등장하는 민살풀이춤의 숨겨진 명무 조갑녀씨의 얘기로 끝을 맺는다.
진씨는 2005년 10월 당대의 명무로 꼽히는 강선영(태평무), 이매방(승무), 장금도(민살풀이춤), 문장원(입춤), 김수악(교방굿거리춤), 김덕명(양산학춤)을 모아 한 무대에 세워 화제를 모았던 <전무후무(全舞珝舞)> 공연의 기획자이기도 하다. 이 공연은 출연자 전원이 70~80대 나이로 한국판 부에나비스타클럽이라는 점, 대통령도 관람한 공연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 공연이 있은 지 2년 만에 진씨는 민살풀이춤만 추는 숨겨진 명무 두 명의 공연을 따로 기획했다.
민살풀이춤이 살풀이춤과 크게 다른 것은 손에 쥐는 수건이 없다는 점이다. 춤에 맞춰지는 가락은 두 춤이 모두 살풀이 장단에 시나위 선율을 얹은 가락을 쓴다. 1950년대 이전에는 수건이 짧거나 없었다는 증언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살풀이춤은 20세기 후반에 전통춤의 심미적 요소를 발전적으로 완성시킨 춤이라고 볼 수도 있다.
때문에 20세기 초반에 춤을 익히고 50여 년 동안 춤판을 떠나 있던 조갑녀씨와 장금도씨의 민살풀이춤이 살풀이춤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진씨도 그런 쪽이다. 그는 살풀이춤에 쓰이는 시나위 선율이 연주자끼리 즉흥적인 합주라는 점에서 이 선율 위에 얹어지는 살풀이춤 또한 무용수의 즉흥성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형태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살풀이춤에서 형식적으로 즉흥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 때문에 진씨는 살풀이춤과 민살풀이춤을 구분해 ‘입춤’이라는 분류를 만들고 교방굿거리춤이나 민살풀이춤, 문장원의 입춤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장금도씨의 민살풀이춤은 살풀이춤과 다르다. 긴 수건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곡선이나 떨잠의 흔들림처럼 여성성을 강조하는 몸짓도 없다. 두 팔을 들어올려 맨 손으로 허공을 툭툭 쳐내며 좌우로 움직여 나간다. 그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어깨 위로 공간이 생기고 미닫이  문처럼 그의 어깨 짓이 변할 때마다 열리고 닫힌다. 같은 민살풀이춤이라도 장씨의 춤과 조갑녀씨의 춤은 또 다르다. 짧게 녹화된 비디오테이프 속에 드러난 조씨의 춤은 장씨의 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적이고 곡선이 승했다.
장씨의 춤을 <전무후무>에서 관람한 조갑녀씨는 “그이 춤이 참 무겁다”라고 평했다. 조씨의 춤을 아꼈던 조씨의 남편도 조씨의 춤에 대해 “춤이 무겁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때 ‘무겁다’라는 말은 ‘진중하다, 진짜 춤이다’라는 말로 새길 수 있다. 조씨와 장씨를 <어머니의 춤> 공연을 통해 한 무대에 세우는 것을 기획한 연출자 진옥섭씨는 “장씨가 일생일대의 호적수를 만난 것”이라며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팔순 넘은 어머니 두 분이 무대에서 춤을 춘다. 조갑녀(85), 장금도(80). 오는 10월18일 국내 최고 무대인 예술의전당에서 <어머니의 춤>이라는 공연을 여는 두 주역 무용수이다.
자식이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기 위해 방문을 열기에도 조심스러운 나이에 이른 두 어머니는 초년 시절 나라에서 알아주는 춤꾼이었다.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던 인생의 봄날 그들은 세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세상의 거친 입이 자식을 향해 쏘아댈 화살을 피해 스스로를 닫고 춤과 결별했던 두 어머니는 팔순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춤을 박대했던 세상과 화해하며 무대에 오른다. 그들이 삼현육각의 가락에 맞춰 어깨를 움직여 손목을 돌리며 발끝을 들어 무대 위로 몸을 내디딜 때 우리는 20세기 중반에 절멸했던 것으로 믿었던 민살풀이춤을 마주하는 마술을 경험하게 된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모진 법이다. 꽃도 열흘 버티기가 어렵다. 당대의 춤꾼이었던 그들에게는 세상도 모질었다. 춤판을 벗어나면 세상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장금도씨에게는 세상만 모진 게 아니라 세월도 유난히 모질었다. 시절마다 세상이 바뀔 때마다 한 번도 그녀를 치대지 않고 지나간 적이 없었다.
장씨는 1928년 전북 군산 개복동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막내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떴다. 해소병으로 고생하던 큰오빠가 홀어머니와 6남매의 살림을 책임지게 되었다.
가난은 그녀를 권번으로 떠밀었다. 옆집에 살던 예기가 허름한 입성 속에서 껑충하게 자란 어린 금도의 몸태를 보고 권번 수업료를 내줄 테니 권번에 입적하라고 어머니에게 권했다. 물론 이는 나중에 곱으로 갚아야 하는 돈이었다.

 
“금도(今桃)라는 이상한 이름, 기생으로 팔라고 그랬죠”라고 어머니에게 울며 쏘아붙였지만 열두 살 금도는 1939년 봄 소화권번에 입적했다.
4년 동안 권번에서 익힌 기량이 물이 오를 무렵은 태평양 전쟁 말기. 조선 반도의 신여성 지도자들이 ‘내선 일체’를 부르짖으며 ‘데이신따이(挺身隊)’에 자원하라고 부추겼다. 말이 자원이지 세상은 그게 공출이라는 걸 알았고 여자로서도 끝이라는 것을 진작 알아챘다. 10대 중반 이상의 딸을 둔 집에서는 전전긍긍했다. 군산에서 손꼽히던 춤꾼이었던 장씨는 군산의 웬만한 유지는 모두 알았기에 공출 위기를 두 번이나 피했다. 하지만 세 번째는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결혼을 하면 정신대 공출을 피할 수 있었다. 장씨는 16세에 열 살 연상의 부여 남자와 결혼했다. 신랑은 ‘소녀 가장’ 장금도 대신 친정 살림을 챙겨주겠다고 했다. 장씨는 배를 타고 금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장씨는 첫 애를 낳고 1년 만에 군산으로 돌아왔다. 죽었다던 남편의 전 부인을 우물가에서 마주치고는 “안녕하세요”라고 철없이 인사했던 기억을 아직도 갖고 있다. 시댁에서 열 명의 친정 식구를 감당해주는 것도 벅차 보였다. 자신이 설 자리는 부여가 아니라 군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씨는 아들을 내놓으라는 시댁의 요구에 도리질을 치며 아들을 품고 군산으로 돌아왔다.
군산에서 장씨는 여전히 일등 가는 춤꾼이었다. 출연 요청이 줄을 이었다. 일급의 예기라도 인력거 한 대를 내어주면 그만이었지만 장금도는 인력거 두 대를 보내야 움직이는 특급으로 꼽혔다. 사정은 있었다. 아들을 한시라도 떼어놓으면 시댁에서 데려갈까 노심초사하던 장씨는 어디를 가든 유모를 대동시켜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인력거 두 대 얘기는 그래서 나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도 어김없이 그녀를 할퀴고 지나갔다. 병석의 오빠가 죽고 남동생이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사망한 것. 어머니, 외할머니, 큰오빠 아이 둘 등 8명의 생계가 그의 춤자락 위에 얹혀졌다.
전쟁 무렵부터 군산항에 모여든 군인들은 춤과 소리를 할 줄 아는 예기 대신 웃음을 파는 여급을 원했다. 김제 만경평야에서 지주 손님들이나 와야 소리와 춤을 청하기 위해 장씨를 찾을 뿐이었다. 권번의 시절이 가고, 우리 춤과 소리는 쇠락의 시기로 흘러들었다.
1953년 군산 대야에서 벌어진 큰 환갑 잔치는 기록해둘 만했다. 서울에서 임방울이 불려 내려왔고 춤은 장금도의 몫이었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임방울은 <쑥대머리>와 <추억>을 사흘 동안 상이 갈릴 때마다 불렀고, 장금도 역시 사흘 내리 잔치 손님이 바뀔 때마다 승무와 살풀이춤을 춰 코피가 터졌다.

춤 ‘팔아’ 생계 이은 한 풀어
1955년 열 살 먹은 아들이 하루는 밖에서 싸우고 돌아왔다. 아들 친구 중 하나가 “니기 엄마 우리 집서 춤췄다”라고 하자 아들은 무작정 달려들었다. 아들이 ‘춤추는 기생’이란 말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최악의 업신여김이라고 알아듣는 나이가 된 것. 아들한테 얻어맞아 코피가 터진 아이의 엄마가 집으로 찾아왔다가 장씨와 마주치고는 둘 다 고개를 떨구었다. 아들의 친구 엄마는 장씨가 그 며칠 전에 가서 춤추었던 잔칫집의 며느리였다. 장씨는 한 해 더 춤을 추며 돈을 모아 집을 산 뒤 춤판을 거두었다.
그녀는 ‘깜깜 절벽’으로 숨은 것이라고 말했다. 춤을 추지도 않았고 지난 시절을 반추할 상대도 없었다. 그저 우두커니 세월을 버티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제주도로 시집간 여동생이 찾아와 장씨를 양장점에 데려갔다. 한복 입고 살면 남들이 이상하게 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길로 장씨는 한복도 끊었다. 그녀는 여지껏 ‘쓰봉’을 입고 산다. 있던 한복은 이웃에게 돌리며 인심을 샀다.
그렇게 웅크리고 살면 더 이상 상처를 안 받을 줄 알았다. 이번에는 오래 가고 깊었다. 월남 파병. 그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었지만 남편 호적에는 넷째였다. 돈만 날렸지 아들의 월남 파병을 막을 수 없었다.
1970년 아들은 멀쩡히 돌아왔지만 병을 얻어온 것을 알아챈 것은 십수 년이 지난 뒤였다. 1975년 아들을 결혼시키면서 장씨는 장롱에 숨겨두었던 사진첩도 불태웠다. 손주와 며느리에게 아들이 겪었던 경험을 반복시키고 싶지 않았다.
1984년 정범태가 사진을 찍고 구히서가 글을 쓴 <한국의 명무> 취재에 응한 뒤 서울 무대에 한 번 선 것을 빼고는 그녀는 춤을 췄다는 것 자체를 꼭꼭 숨겼다. 1998년 전통예술 연출가 진옥섭씨가 질기게 덤볐다. 진씨는 결국 그녀를 <명무초청공연> 무대에 세웠다. 그때도 장씨는 며느리에게 “계모임에서 온천 간다”라며 상경해 무대에 섰다.

 
믿고 의지한 아들에게 1990년대 들어 고엽제 후유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장씨의 긴 걱정은 또 시작되었다. 아들이 걸음조차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 아들은 2급 상이용사 판정을 받았다. 그 깜깜 절벽에 춤을 추러 서울에 올라오는 것은 그녀에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그녀는 “달떴다”라고 표현했다.
어머니의 춤은 2005년 아들에게 제대로 들켰다. 장금도는 그해 10월8일과 9일 이틀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전무후무>라는 공연에 참가했다. 첫날 공연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관람했다. 이른바 어전(御前) 공연을 한 셈이다. 둘쨋날 공연이 끝나고 난 뒤 연출자 진옥섭씨가 무대에 올랐다. 진씨는 “평생 기생이라는 낙인 때문에 춤추는 어미라는 것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장금도 선생과 아들이 이제 화해를 할 때”라며 객석에 있던 아들 이영철씨를 불러올렸다. 그날 공연에 장금도의 아들 내외와 손자 등 온 가족이 온 것을 장금도씨만 몰랐다. 아들은 깜짝 놀라 입만 벌리고 선 어머니에게 꽃다발을 안겼고 모자는 무대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 뒤로 어머니는 아들 내외 몰래 춤추러 서울 간다며 혼자서 보따리를 싸지 않아도 된다.
요즘 고엽제 후유증이 악화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들은 무릎 관절이 쑤시는 팔순의 어머니와 군산에서 함께 살고 있다.
남원의 조갑녀씨는 춤을 버리고 꽁꽁 숨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장씨와 같지만 평탄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는 다른 경우이다.
장씨를 기어이 무대 위에 불러올린 전통공연 연출자 진옥섭씨는 조갑녀씨도 무대에 세우기 위해 9년 넘게 공을 들였다. 1998년 명무전 공연에 조씨를 세우기 위해 진씨가 물어물어 달려갔지만 조씨는 “사진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다”라며 잡아뗐다. 말이 길어지면 “사위 온다, 어서 나가라”라며 진씨의 등을 떠밀었다.
1923년생인 조씨의 공식 기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조씨가 남원 국악원 대청마루에서 춤추는 사진이 지난 1985년 발간된 <한국의 명무>라는 책에 실리면서부터이다.
하지만 책에 실린 이름은 ‘조갑례’. 춤사위에 대한 얘기만 있었지 그녀의 신상명세는 한마디도 실리지 않았다. 자손에게 화를 입힐까 조씨가 극구 사양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가명으로 실렸다.
사실 그 사진은 조갑녀씨의 남편인 정종식씨가 지켜보는 앞에서 찍은 것이다. 전통예술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던 정씨는 예인인 부인을 자랑스러워하고 명무의 기록을 남기겠다는 사진기자의 설득에 못 이겨 촬영을 허락했다.
조씨는 남원 금리 태생으로 여섯 살 때부터 남원 권번에서 소리와 춤 등 전통예술을 배웠다. 조씨의 아버지가 권번의 선생이기도 했다. 조씨는 16세 때부터 3년간 권번에서 주는 ‘품행상’이라는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춤과 소리, 악기에서 발군의 솜씨를 보였기에 받았던 상이다. 공교롭게도 이는 훗날 조씨의 시아버지가 될 어른이 주는 상이었다.
18세 나던 해 조씨는 남원에서 한성물산이라는 직물공장을 크게 하던 정종식씨와 결혼을 했다. 정씨는 군산과 남원에 공장을 운영하며 당시 전북에서 고액 납세자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였다. 정씨는 처가도 극진히 돌보았다. 딸만 남긴 장인 조기환의 무덤을 돌보는 것도 맏사위 정종식씨의 몫이었다.
결혼 뒤 조씨는 6백 평이 넘는 남원 집 안마당에 숨어들었다. 열두 명의 자녀를 두고 부잣집 맏며느리로 살면서 세상과 담을 쌓았다. 울 밖에 나서지도 않았다. 남편이 사다주는 국악 LP판을 듣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국악 공연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남원에 승사교가 놓일 때 다리 이편과 저편을 오가며 승무를 추며 개통식을 축하하던 예향 남원의 열세 살 먹은 춤꾼은 그렇게 세상에서 잊혀져갔다.
그러다 1983년 남원 광한루에 완월정을 새로 세우며 기념식이 열렸다. 지역 유지들이 기념 공연으로 조갑녀의 춤을 청했다. 예악에 이해가 깊었던 남편 정종식씨는 이를 허락했고 다른 식구들은 아무도 모른 채 조갑녀는 고깔을 쓰고 춤을 추었다. 이것이 그만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실황을 통해 중개되는 바람에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을 뻔도 했다.
하지만 인연의 끈은 질겼다. 1984년 일간스포츠에 <명무>를 연재하던 사진기자 정범태씨(85·풍류방 대표)가 1951년 당시 남원 군산 일대에 머무를 때 인간문화재 강도근(1918~ 1993)에게 들었던 남원 명무 조갑녀씨 얘기를 기억해 낸 것. 정범태씨는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토벌대에 문관으로 참여하며 군산 남원 일대에 주둔한 인연이 있어 그 동네 얘기에 훤할 수 있었다.
기억을 줄 삼아 남원을 찾아간 정범태씨는 정종식씨를 두 시간 동안 설득해 남원 국악당 대청마루에서 춤추는 조갑녀씨를 찍을 수 있었다. 물론 일체의 신상정보는 생략되었다. 세상의 이목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딸들이 학교에서 신식무용을 배워도 가타부타 말도 없었다. 딸 가운데 하나는 무용을 전공했지만 어머니가 명무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자녀들 앞에서 정종식씨가 팔순 넘어서 지나가는 말로 “엄마 춤을 배워야…”라는 말을 했던 것을 딸 정명희씨는 기억하고 있다. 부인을 “세상에서 제일 얌전한 사람, 엄마의 십분의 일만 하고 살면 잘하고 살 것이다”라며 딸들에게 가르친 정종식씨는 1993년 9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후 조갑녀씨는 더 움츠러들었다. 정범태씨의 사진 한 장에 드러난 조갑녀씨의 예사롭지 않은 춤태에 끌린 진옥섭씨가 1998년부터 9년 넘게 문지방이 닳게 드나들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을 뿐이다.

가족이 인정해주기까지 평생 걸려
하지만 세상 일은 알 수 없다. 2004년 6월 새벽에 운동을 가던 83세의 조갑녀씨가 광한루 앞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허리 수술 받고 사경을 헤매던 조씨는 9개월의 투병 끝에 병상에서 일어났다. 그 무렵 조씨의 여섯째 딸 명희씨는 어머니 몰래 전통 춤을 배우고 있었다. 대학을 나와 가정주부로 있던 조씨는 2005년 4월 한 공연장에서 어머니의 사진을 찍었던 정범태씨를 만나 어머니의 1984년 사진을 건네받았다. 가족 중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빼고는 그가 처음보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은 정씨는 명희씨에게 “어떻게 하든 어머니의 춤을 배우라”고 권했다. 정씨는 조씨의 춤이 그녀가 세상을 뜨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귀중한 춤이라고 표현했다.
가족들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의 춤을 인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해 10월 초 조씨는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생애 처음으로 춤추는 모습을 30분가량 녹화했다. 춤을 배우는 딸 명희씨에게 가르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전무후무>를 구경하러 갔다. 예술의전당에서 전통 무용계의 팔순 가까운 명무들이 대통령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조씨의 마음이 좀더 가벼워진 듯하다.
비디오에 담긴 조씨의 춤은 세월에 사그라진 육신을 무색케 했다. 수선스럽게 쳐들어오는 북과 장고의 박자를 치마 끝을 살짝 들어 끌어 안은 뒤 버선발로 살살 다스려 궁글리며 자신의 호흡을 새긴 박자로 되돌려보냈다. 조금 전까지 지팡이를 짚고 있던 팔순의 할머니는 사라지고 무대에는 슬쩍슬쩍 몸을 흔들며 젊은 악사들이 쏟아내는 박자를 제대로 다스리는 명무가 서 있을 뿐이다.
“저런 춤은 어떻게 추세요?”
“나오는대로 추지…나오는대로 혀…뭐가 있을 테지….”
모시적삼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할머니는 왜 옛날 일을 꼬치꼬치 묻느냐고 몇 번을 되물었지만 묻는 말에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춤이 참 좋다’는 말에는 허허하고 웃기만 했다.
세상의 거친 입에 상처를 입은 두 어미는 새끼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꽃 피던 어느 봄날 자신의 재주를 땅에 묻었다. 땅에 묻은 그 재주는 반세기가 흘러도 여전히 빛났다. 팔순의 백발 노인이 되어서야 두 어머니는 이제야 온전히 자신을 위해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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