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 말하고, 말 속에 침묵하다
  • 김회권 기자 ()
  • 승인 2007.10.0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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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표의 ‘경선 패배 후 40일’ / 칩거 끝내고 10월부터 대외 활동 재개

 

요즘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미니홈페이지는 연예인의 그것만큼 인기가 높다. 박 전 대표가 가끔 미니홈페이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곤 하자 지지자들이 모여 박 전 대표에게 한 마디씩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경선 패배 후 박 전 대표는 자신의 첫 심경을 이곳을 통해 밝힌 적이 있다. ‘지지자들과 캠프 관계자들에게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는데 6백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비록 경선에서 패배했지만 그 인기는 승자와 맞먹는다.
박 전 대표는 언론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최근 박 전 대표의 동선을 따라잡기는 매우 어렵다. 홈페이지의 일정 란에는 ‘통상 업무’라고만 표시되어 있다. 보좌관이나 비서관들은 입을 열지 않는다. 무작정 서울 삼성동 라마단 호텔 근처라는 힌트만 가지고 행인들에게 물어가며 박 전 대표 자택에 겨우 도착했다. 자택 바로 뒤편은 삼릉초등학교이다. 학생들만 재잘거리며 가끔 지나갈 뿐 검은색 철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근처 상인에게 “여기 박 전 대표 자주 왕래 하시나요”라는 질문을 하니 “그 분 참 보기 어려운 분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박 전 대표의 집은 집사와 가사도우미만 주기적으로 드나들 뿐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한다. 간혹 경비원이 나와 마치 기자가 있는지 감시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높게 이어진 벽돌담과 창가에 쳐진 커튼은 박 전 대표가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는 상징처럼 보인다. 오직 경선 이후 최병렬 전 대표만 그녀의 집을 방문해 30여 분간 면담했다. 이런 까닭에 국회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조차 뉴스거리가 된다. 국회의원이 단지 일터에 나왔을 뿐인데도 말이다.

“패배한 뒤 정치인으로서 역량 더 커졌다”
박 전 대표가 여전히 관심을 받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경선 패배 후 정치인으로서 역량이 더욱 커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깨끗한 경선 승복의 자세 때문이다. 사람들은 박 전 대표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저 박근혜 경선 패배를 인정합니다”로 시작하는 ‘쿨’한 패배 발언을 놀라워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유시민 후보가 한 달의 경선 과정을 정리하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과 비교하면 그녀의 태연함이 놀라울 뿐이다. 그녀의 깔끔한 경선 승복은 공직선거법의 개정을 통해 경선 참여자가 불복할 수 없도록 제도적 강제를 한 탓이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 정치인의 불복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준 것도 사실이다. 8월27일 서울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있었던 캠프 해단식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해단식 이후 그녀는 칩거에 들어갔다. 대신 박 전 대표측 의원들은 그녀의 입을 대신해 이명박 후보의 독선적 당 운영을 비판했다. 겉으로는 통합을 이야기하지만 당의 주요 자리에 친이(親李) 인사를 앉히며 독식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후보가 안상수 원내대표, 이방호 사무총장 등 굵직한 자리에 자신과 가까운 인사를 포진시키더니 홍보기획본부장, 전국위원회 의장 등도 측근 인사를 배치했기 때문이다. 현재 시·도당위원장 역시 10곳이 이명박계로 분류되는 의원들 몫이다. 박 전 대표는 서울시당위원장 선거에 두고 이명박계 초선인 공성진 의원이 나오자 “당이 이렇게 위계질서가 없어서야”라고 말하며 유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공성진 의원과 경쟁하던 홍준표 의원은 “당직이 전리품이냐”라고 말하며 후보 등록을 포기해버렸다. 그동안 이명박

 
후보는 지속적으로 “당의 통합을 위해 박 전 대표와의 만남을 원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루어진 9월7일의 만남에서 화해는 이루어졌을까. 박 전 대표측의 한 의원은 “단순히 ‘잘해보자’는 흔한 말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후보가 말하고 박 전 대표는 듣기만 하는 대화 아닌 대화가 이루어졌다”라고 말했다. 이후보는 회동 이후 “아주 잘 만났다. 경선 끝나고 했던 말이 진실인 것 같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며칠 후 박 전 대표측 의원들은 회동을 갖고 독자적인 시·도당위원장 후보를 내세워 이후보측과 힘겨루기를 하겠다고 밝혔다. 만남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양측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개정된 선거법으로 그녀는 더 이상 올해 대선에 나올 수 없다. 공직선거법 제57조 2항은 ‘경선 후보자로서 당해 정당의 후보자로 선출되지 아니한 자는 당해 선거의 같은 선거구에서는 후보자로 등록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박 전 대표는 여전히 강한 지지층을 가지고 있다. “신당 하나를 꾸려도 유력 정당이 될 수 있을 수준이다”라는 정가의 관측이 있을 정도이다. 한나라당 앞에는 ‘경선 결과의 무효’를 주장하는 그녀의 지지자들이 경선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앉아 있다. 이들은 여론조사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이명박 후보의 자격을 문제 삼고 있다. 특히 이후보의 낙마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선대위원장 맡을 가능성 크지 않아
지난 8월 경선 직후 이명박 후보의 낙마설은 여의도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한나라당의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우리 사이에서도 낙마설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윗사람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선 이후 이후보의 지지율은 60%까지 치솟았다. 대항마들의 지지율이 한자릿수에 머무르고 있어 ‘대세론’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튀어나온 못이 정을 맞는 법. 이후보의 과거 의혹이 터진다면 낙마할 수밖에 없고 박 전 대표가 바통을 이어받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그런 움직임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무성 의원 등은 “박 전 대표의 경선 승복 정신을 훼손하지 마라”라며 농성중인 지지자들을 타이르기까지 했다.
박 전 대표는 9월13일 환경노동위원회 활동을 위해 경선 이후 처음 국회 나들이에 나섰다.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당분간 얘기하지 않겠다. 자꾸 말을 하면…”이라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세력 대 세력의 대결 양상으로 보이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날 환노위에서는 이명박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상임위원회 정식 안건으로 다루는 문제를 놓고 여당과 야당이 옥신각신했다.
박 전 대표는 추석 연휴가 지나고 나면 조금씩 활동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모교인 서강대 개교 50주년 기념식을 비롯해 10월9일에는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 군민의 날 행사에도 참석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정치 행보로 보는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이다.
한편 이후보는 10월 초 선거대책위원회 인선을 마무리하고 본대를 꾸려 본선 경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박 전 대표를 선대위에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을 가능성은 크지 않으며 명예 선대 위원장이나 고문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박 전 대표측 의원들의 참여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명박측 독식’이라는 세간의 비판이 또 나올지 모른다. 이재오 최고위원은 “선거를 치를 때까지는 당연히 후보 중심의 당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한 라디오 방송에서 밝혔다.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박 전 대표에게 경선 후 지난 40여 일은 모처럼의 휴식의 시간일 수도, 복잡한 고민의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 내딛는 길은 만만치 않는 고행길일 것 같다. 박 전 대표는 9월15일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에 “새로운 계절이 오면 항상 우리가 계절에 맞춰 모든 것을 바꿔가고 그 계절에 순응하면서 살아왔다”라고 감상을 읊었다. 하지만 순응하고 살기에는 바람이 매섭고 모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그녀는 홑몸이 아니다. 그녀가 울린 수십 명의 국회의원들이 곁에 있다. 배지를 위해서라도 그들은 박 전 대표를 들어 다시 중앙으로 밀어올려야 할 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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