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스 개막 만찬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 안성찬 (골프팁스코리아 대표이사) ()
  • 승인 2007.10.1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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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PGA 2승 올리고 귀국한 최경주 인터뷰 / “모든 샷에 자신 있어…랭킹 5위 안에 들겠다”

 

"아마도 골프를 하지 않았으면 외항선을 탔겠지요.”
언젠가 ‘탱크’최경주(37·나이키)에게 골프를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하고 궁금해서 물어본 말에 돌아온 답이다. 바닷가에서 자라서 수산고를 졸업했으니까 당연히 배를 탔으리라고 생각했을 터. 그런데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운명인가. 그 조그만 섬마을에 들어선 골프연습장은 겨우 8타석이지만 최경주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은 ‘황금의 텃밭’이다.  
이제 골프에 관심이 없어도 남녀노소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 이미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그가 들어 있다. 고향 완도에 동상이 세워지고 그의 이름을 딴 길이 생길 정도로 누가 뭐라고 해도 ‘영웅’이다. 조만간 그의 성공 스토리를 소재로 한 20부작 드라마도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가난을 극복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스타덤에 오른 최경주. 1년 만에 다시 한국 팬을 찾은 그가 신한동해오픈(레이크사이드CC, 10월11~14일)에 출전해 호쾌한 샷을 선보였다. 올 시즌 미국 PGA투어에서 2승을 달성한 물오른 샷을 보여주며 팬들을 마냥 즐겁게 해주었다. 모처럼 귀국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고국을 방문한 소감은?
1년 만에 귀국했다. 지난해 신한동해오픈 이후 처음이다. 올해 2승을 해서 그런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기쁜 마음으로 한국에 왔다. 지난 8년간 투어에서 활동했지만 본격 적인 투어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3년이다. 2002년 우승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 이후 열심히 훈련한 결과가 요즘 나오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퍼트가 좋아지면서 전체적인 샷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
(그는 2002년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컴팩클래식에서 미국 PGA투어 데뷔 후 첫 승을 거두었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이다. 지난 10월7일 코오롱·하나은행 한국오픈에서 우승한 피지의 ‘흑진주’비제이 싱(44)에 버금간다. 연습장에 마지막까지 남는 선수는 최경주와 싱뿐이다. 2000년 미국에 진출한 뒤 2년을 외로움과 싸우며 홀로 그린과 사투(死鬪)를 벌일 때 오직 연습에만 몰두했다. 손바닥은 쩍쩍 갈라진 논바닥과 비슷했다. 피가 맺혀 터진 자리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터지기를 거듭하면서도 그는 하루 1천개씩 볼을 때렸다. 외국 선수들의 거리와 기술을 따라잡으려면 연습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요즘도 이전처럼 연습을 하나?
무한 도전은 무한 연습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변함이 없다. 다만, 연습 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이전에는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연습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호주의 스타 그렉 노먼도 손바닥에서 피가 줄줄 흐를 때까지 밤새도록 클럽을 휘둘렀다고 들었다. 지금 나는 생각하는 골프를 한다. 다양한 샷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상황에 맞는 연습을 한다. 대회 중에는 5백개 정도 구질을 살피며 컨트롤 샷을 하고 비시즌 때는 1천개 이상 볼을 친다. 체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근력 유지와 유연성에 중점을 둔다. 특히 대회 중에는 리듬감을 살리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샷을 자유로이 날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인가?
하이나 미들, 그리고 로페이드샷은 원하는 대로 한다. 특히 좋아진 것은 트러블샷이다. 벙커샷은 타이거 우즈조차 혀를 내두른다. 사실 언젠가 다른 선수로부터 ‘너처럼 퍼트도 못하고 어프로치에 약한데 어떻게 상위권에 랭크됐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된 것 같다. 수많은 비디오와 레슨 서적, 그리고 코치의 말을 들으면서 쇼트게임에 집중하면서 뭔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퍼트를 비롯해 모든 것에 자신이 있다. 퍼트가 좋아지면서 전체적으로 샷이 콤팩트해진 느낌이다.   
승수를 추가하면서 위상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
풀시드가 없어 대기 선수로 투어를 쫓아다닐 때와는 천지차이이다. 그때는 의사소통도 어렵고 호주머니도 가벼워 정말 서러움도 많이 느꼈다. 이제는 많은 것들이 확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대회장에서 갤러리들이 ‘케이제이초이(K.J. CHOI)’를 외치며 응원을 하는가 하면 톱클래스의 선수들도 먼저 인사를 해온다. 대회장마다 스폰서들이 찾아와 다음 대회에 나와달라고 부탁을 한다. 미국은 기회의 땅, 아메리칸 드림을 실감할 수 있는 국가임을 새삼 느낀다. 전용 비행기나 전용 승용차를 내주기도 한다.

 

세계의 골프 벽이 높다고 말한 적이 있다. 생각에 변화가 없는가?
실은 미국 PGA투어에 발을 들이고 우승한 뒤에도 세계 톱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톱을 유지하고 있는 타이거 우즈나 필 미켈슨, 그리고 비제이 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신체적 차이로 인해 그들의 비거리를 능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기술 샷은 연습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신체적 차이에서 오는 거리는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안다. 현실적으로는 어렵겠지만 랭킹 5위 이내 진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랭킹보다는 마스터스에서 우승해 만찬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생각이 더 크다.
(그는 ‘챔피언스 디너’를 주재하는 것이 소망이다. 마스터스의 개막 만찬에서는 전년도 챔피언이 메뉴를 고른다. 그 식탁에 된장찌개를 올리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는 2002년 이후 미국 PGA투어에서 6승을 올렸고 유럽투어에서 1승을 추가했다. 올 시즌 미국 PGA투어에서 4백58만7천8백59달러를 벌어들여 상금 랭킹 6위에 올라 있고, 페덱스컵 포인트 103,765로 랭킹 5위를 마크하고 있다. 특히 월드 랭킹에서 5.6점을 받아 9위에 랭크되어 있다.)
우즈를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모든 선수들의 두려움의 대상이다. 마치 정글의 맹수인 사자와 같다. 우즈의 앞에 서면 무언지 모르게 주눅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극복해야만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그런 연습을 하고 있다. 9월에 열린 프레지던트컵 첫날 경기에서 타이거 우즈 조를 맞아 완패했다. 역시 천하무적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우즈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이 있다는데.
그것은 생활 환경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 우즈는 모든 것이 주어진 상태에서 최정상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열악한 환경에서 독자 생존한 것 자체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즈가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면,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 프로 골퍼의 꿈을 키워왔다. 정상급 선수라는 공통점에서는 같지만 걸어온 길은 너무도 다르다. 우즈가 미국과 미국 기업 및 골프 전문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면 나는 외딴 섬에서 누구 하나 돌봐주는 이 없는 가운데 부모에 의지해 자랐고 슈페리어를 비롯해 일부 스폰서에 의해 성장하고 발전했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나이키의 후원을 받는 최경주이지만 시작은 미약했다. 프로 초기에는 몇 백 만원의 용품사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불굴의 투지와 독학으로 세계 정상에 오른 그는 탱크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 데다 배짱이 두둑하고 강심장이다. 완도의 섬소년답게 벙커샷이 일품이다. 늘 부족하다며 부단한 연습을 하고, 신앙심이 돈독하며 무엇보다 따듯한 마음을 지녔다. 남몰래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기도 한다. 그가 아내를 통해 국내 결식 어린이들에게 지원한 성금만 2억6천4백79만원에 이른다는 사실도 얼마 전에야 알려졌다. 별도로 국내 대회에 올 때마다 상금에 더 얹은 거액을 수재민이나 복지 시설에 낸다.)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
내겐 과분한 사람이다. 내가 경제적 능력이나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미래에 대한 꿈이나 서로 생각하는 것에 공통 분모가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만날수록 정이 가고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집사람과 나는 전혀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섬에서 태어나 공부도 제대로 못한 운동 선수이지만 아내는 법대를 졸업한 재원이다. 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만났다. 나는 신자도 아닌 데다 오로지 운동만 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도 어울리지 않아 보일 것이다. 게다가 무명시절이었으니….
(결혼 후에도 최경주의 아내 김현정씨는 계속 직장에 다니며 그를 뒷바라지했다. 아내가 월급을 타면 회식을 했다. 그러나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라면으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프로골퍼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어떤 생각을 했나?
프로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나아지리라는 것. 그러나 그것은 꿈에 불과했다. 프로가 된 후에도 ‘모셔가는’곳이 한 군데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정식 프로 자격을 받은 것이 짐처럼 느껴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미프로처럼 아무 연습장이나 가서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 무렵 잠시 딴 생각을 하기도 했다. 프로를 포기하고 취직을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인천의 한 연습장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그는 1999년 미국 PGA투어 퀄리파잉스쿨(Q스쿨)에 응시했다. 코오롱한국오픈과 일본투어에서 우승을 거두어 자신감도 차 있었다. Q스쿨을 통과했으나 35위를 차지해 풀시드는 받지 못했고, 다만 조건부로 출전하는 대기 선수가 되었다. 일명‘땜빵용 선수’로서의 고달픈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2000년에는 상금 랭킹 1백34위로 다시 Q스쿨을 받아야 했다.)
미국에 진출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면?
무엇보다 언어 장벽과 생활 문화 차이가 컸다. 말이 안 통하는 것이 가장 답답했다. 프로 선수들과 눈인사를 하고, 아는 영어 단어를 최대한 끌어내 말을 붙여보려고 했지만 그들은 우월의식이 강한 데다 내가 무명이다 보니 아는 척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여겼다. 스스로 채찍질을 해가며 고된 연습으로 이국 생활의 고달픔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어려웠던 점은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투어를 해야 하는 유랑 생활. 모텔을 전전하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 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아껴서 쓰더라도 연간 투어 생활비가 20만 달러는 족히 들어갔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다. 특히 늘 마음을 짓누른 것은 수시로 엄습해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최근 들어 최경주는 영어를 곧잘 한다. 선수들과 농담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면서 한 것은 영어 공부. 고교 졸업 때까지 운동만 했는데 쉬울 리가 있겠는가. 미국 진출을 앞두고 하루에 영어 단어 4개와 문장 1개를 외워야만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 습관은 미국에서도 계속되었다. 늦게 배우는 만큼 고통이 따랐지만 아내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영어 공부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기 선수를 하려면 비용이나 체력이 그만큼 더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 Q스쿨 통과지 풀시드가 없는 대기 선수는 찬밥 신세이다. 존 댈리가 대기 선수로 있다가 한 선수가 불참하는 바람에 밤새 차를 달려 PGA선수권에 출전해 우승한 것은 행운이다. 티오프 시간은 꼭두새벽이 아니면 맨 뒤쪽에 배정한다. 만일 불참 선수가 없으면 하루를 공치는 것이다. 정말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1억원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고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경제난이 닥치자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투어를 쫓아다니는 것에 자신감을 잃었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자꾸만 천길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가. 그러다가 최경주는 기적처럼 미국 PGA무대에서 살아남는다. 바닷가에서 모진 풍랑을 헤치고 살아난 어부처럼 그렇게. 겨울이면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을 인내하면서 기른 강인한 정신력의 승리였는가.)
첫 우승을 기대했는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어안이 벙벙하다. 게임을 어떻게 끌고 갔는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한 홀 한 홀 기도하는 마음으로 샷을 하고 퍼팅을 했다. 하느님이 인도를 해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절망의 끝에서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살려내자는 심정으로 출전해 우승했는데…미국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의 잉글리시턴골프클럽에서 벌어진 컴팩트클래식(총상금 4백50만 달러)에서 챔피언컵을 손에 쥐는 순간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기억을 되살려 조금 더 설명을 해준다면.
아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애 시절부터 고생만 시켰는데. 말도 잘 안 통하는 미국 땅에 와서도 나와 두 아이 호준(11)이와 신영(6)이만 보고 살아준 것이 고맙다. 우승도 어쩌면 아내의 눈물겨운 기도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당시 5월8일이 호준이 생일이었는데 내심 호준이와 약속을 했다. 반드시 우승컵을 생일 축하 선물로 내놓겠노라고. 그것이 이루어져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라운드 때 신은 골프화의 태극 문양이 인상적이다.
미국에서 투어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시도 고국을 잊어본 적이 없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태극기를 보면 가슴이 찡하고 힘이 솟는다. 주니어 시절에는 국가 대표선수가 태극마크가 새겨진 옷이나 캐디백을 갖고 다니는 것이 정말 부럽기도 했다. 지금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태극기를 단다.
골프 선수들은 플레이를 하면서 담배와 술을 할 수 있는데.  
지금은 안 한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두주불사였다. 담배도 골초였고. 하지만 이제 술과 담배가 낯설다. 다만, 가족끼리 있을 때 와인 한 잔 정도 한다. 그리고 꼭 마셔야 할 일이 생기면 1년에 세 번 정도 날을 잡아놓고 한다. 이는 아내와의 약속 때문이다. 아내와 교회를 다니면서 약속을 했다. 술·담배를 하지 않겠다고. 그것을 잘 실천하고 있다.
잔(盞)에 대한 철학이 있던데.
늘 잔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우승했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항상 부족한 것을 느낀다. 그래서 잔에 비유를 한다. 미국 데뷔 초기에 나의 잔은 모두 비어 있었다. 1승, 2승을 하면서 잔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다. 아마도 메이저대회 우승이나 마스터스에서그린 재킷을 입으면 3분의 2쯤 잔이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 설계를 하면서 잔을 더 채워갈 것이다. 그것 때문에 늘 부족한 나 자신을 돌아보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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