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실험’ 돌풍 이어갈까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 승인 2007.12.1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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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문국현, ‘가치·비전 논쟁’ 이끌며 신선한 충격…총선에서 결과 갈릴 듯

 
정치권만큼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는 곳도 없다. 매번 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가 제대로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는 한다. 대선이 있은 탓에 올 한 해도 다양한 인사들이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그중 가장 주목되는 정치인은 창조한국당 대선 후보로 나선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이다.
일찌감치 범여권의 대선 주자로 손꼽혔던 그는 ‘현실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주의자’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가치와 비전 논쟁’을 이끌며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의 ‘정치 실험’이 성공이냐 실패냐를 예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다만 대선 과정만을 놓고 본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치 참여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선 출마를 결심하게 만든 사람은 이명박씨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와 가족의 재산을 불리는 데만 관심이 있던 사람, 부패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라며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비난했다.
그에 맞선 자신의 지론은 ‘사람이 희망이다’라고 했다. ‘사람 입국(立國)’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는 그는 “혼이 있는 경제, 약자에 대한 배려, 부정부패 없는 나라, 깨끗한 번영이 목표이다”라고 밝혔다. ‘경제 대통령’ 이미지로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였던 이명박 후보와 ‘진짜 경제’를 놓고 한 판 대결을 펼쳐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그렇게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지 100여 일. 정국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례가 없는 ‘보수 열풍’ 속에서 이에 맞선 범여권의 ‘후보 단일화’ 논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대통합민주신당은 후보 단일화 실패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며 “이명박 후보를 돕는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비판했다.
중재를 맡았던 시민사회단체 인사들도 그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윤준하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는 “처음부터 문후보는 단일화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가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비판도 감수하려는 각오인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링에 올라오지 않는데 심판을 어떻게 보겠느냐”라며 답답해했다.
대선 정국은 성공한 기업인 문국현이 정치인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문후보는 지난 8월 정치 참여 선언과 함께 범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자리 잡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범여권’이라는 꼬리표는 문후보로 하여금 ‘선택’을 강요했다. 경선에 참여하라는 통합신당의 요구를 거부한 후 당을 만들어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에 나섰던 그는 대선 정국이 이명박 후보의 독주 체제로 흘러가자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 세력으로부터도 끊임없이 단일화 압박을 받아야 했다.
스스로 오락가락한 측면도 있다. “비전과 가치가 맞지 않다”라는 이유를 들어 독자 행보를 해오다가 선거가 막바지로 접어들자 “단일화에 나서겠다”라는 뜻을 밝혔다. 이후 그의 요청에 따라 시민·사회 인사들이 중재에 나섰지만 ‘TV 토론회 6회 개최’라는 현실적으로 무리한 전제 조건을 내걸어 사실상 협상을 파기시켰다. ‘정동영 사퇴’ 주장도 중심을 못 잡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락가락 ‘후보 단일화’ 행보로 눈총도

그의 이같은 행보는 후보 단일화를 바라보는 시각 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대선 승리를 위해서 ‘단일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보는 정후보측과 달리 문후보측에서는 ‘단일화만이 능사는 아니다’라는 기류가 형성되어 있었다. 지난 두 차례의 대선과 달리 후보 단일화가 승리의 ‘보증 수표’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공공연하게 제기되었다.
특히 “정동영 후보로 단일화할 경우 승산이 없다”라는 주장이 펼쳐졌다. “정후보의 집권을 노무현 정권의 재집권, 그 연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민은 결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가 처한 ‘곤궁한 현실’도 맞물려 있었다. 당초 기대와 달리 답보 상태인 지지율은 단일화 논의를 주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제1당의 후보와 대등한 협상력을 갖기에는 문후보의 세력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높은 지지율이 이를 상쇄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지지율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정후보와의 격차는 커져갔다.
문후보가 유세 일정을 취소하고 단일화 협상에 대한 결단을 준비하던 12월3일 오전 선대본부 회의에서는 이러한 상황의 심각성과 향후 대응책에 대한 토론이 펼쳐졌다. “정동영 후보측에서 단일화를 주도하고 우리는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국민의 외면을 받는 것 아니냐”라는 진단이 나왔다. “3강은 잠실야구장에 있는데 우리는 동대문야구장에 있다” “과감하게 문을 열고 경기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라는 등 결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았다고 한다.
결국 ‘문국현의 정치 실험’은 내년 4월 총선에서 판가름 날 가능성이 커졌다. 그는 총선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 문후보는 대선 투표일을 1주일여 앞둔 지난 12월11일 “이번에 뿌린 씨앗이 총선으로 이어지면서 4년 전 총선이 그랬듯이 획기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자신했다. 대선 이후 정치 세력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활로가 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선과 마찬가지로 총선도 갖가지 난관을 헤쳐야 하는 가시밭길 위에 놓여 있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가치와 비전’ 논쟁과는 별개로 ‘정치적 신뢰’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비교적 우호적이던 통합신당의 한 의원조차 “뭘 믿고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범여권 내의 전반적인 인식이 어떠한지를 가늠하게 한다.
리더십에 대한 지적도 있다. 내부에서도 “결정적인 상황에서 결단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라는 요구가 있었다. 올 한 해 희망과 고난을 함께 경험한 ‘정치 신인’ 문국현. 그가 ‘정치 2년차’를 맞는 내년에 더욱 더 주목되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의 정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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