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권은 대통령의 ‘은전’이 아니다
  • 고성국 (시사평론가·정치학 박사) ()
  • 승인 2008.01.0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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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하면 법치주의 근간 흔들어 국가와 대통령의 법적 지위까지 위험…국민의 상대적 박탈감을 먼저 생각해야

 
지난해 12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중 마지막이 될 사면을 단행했다. 일부 사형수들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점이나 공안·노동 사범들의 사면에 담겨 있는 인권 옹호적 측면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이번 사면의 초점은 아무래도 김우중씨 같은 경제인, 한화갑·박지원 씨 등 정치인, 그리고 최도술씨 같은 대통령 측근 인사, 즉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권력층에 대한 ‘임기 말 떨이 사면’에 있지 않나 싶다.
대통령 사면권의 남용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에 의해 지난해 11월23일 국회를 통과한 사면법 개정안의 3개월 경과 규정 기간 중 단행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면은 정치적으로도 떳떳하지 못한 ‘새치기 사면’으로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특히 이번 사면에 포함된 임동원·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의 경우, 이들이 1, 2심 재판 내내 무죄를 주장했고, 지난 12월27일 대법원에 상고까지 했다가 불과 2시간 만에 상고를 포기해 형을 확정지은 후 3일 만에 사면됐다는 점에서 사면을 둘러싸고 노무현 정부와 사전 조율을 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번 사면을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이런저런 비판은 대통령의 사면권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면권의 남용에 대한 것이다. 대통령의 사면권은 통상적인 법률적 행위를 넘어서는 국가 원수로서의 통치권 행사이므로 말 그대로 그 성격에 걸맞게 예외적으로, 제한적으로, 신중하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등에서는 고위층 인사 사면 대상에서 제외

미국에서는 대통령 사면권 행사가 매우 이례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나마 고위층 인사는 사면 대상이 되지 않는 점, 독일이 법적 평등이나 법적 안정성을 존중하는 토대 위에서 사면권이 행사되어야 한다고 규정해 원천적 제한을 두고 있는 점,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취임 기념 사면을 하지 않은 사실 등은 선진 민주 국가에서 사면이 극히 예외적으로 신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지난해 11월23일 국회를 통과한 사면법 개정안이 법 개정 이유로 ‘법무부장관이 대통령에게 특별 사면, 특정한 자에 대한 감형 및 복권을 상신할 때에는 사면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데서도 사면심사위원회라는 일종의 여과장치를 두어 대통령 사면권의 정치적 남용을 막고 사면권이 예외적으로 신중히 행사되도록 하겠다는 국민의 뜻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일반적으로 사면의 발생지를 기원전 5세기 아테네로 잡는데, 이는 폭정을 일삼은 친스파르타 30인 참주의 처형 요구에 대해 새 정부가 처벌은 물론 재판조차 못하도록 막은 것을 최초의 사면이라 보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대중의 요구대로 30인 참주를 처형할 경우 친스파르타파와 반스파르타파로 나라가 양분될 위험이 있고 스파르타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끝에 나라의 안전과 보전이라는 상위의 가치에 입각해 실정법과 국민 감정을 넘어서는 통치권으로써 사면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 최초의 사면권 행사 이후 현대 법치 국가에 이르기까지 통치권 차원의 사면권과 실정법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야 한다”라며 사면을 법치주의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해 사면권 반대를 주장한 칸트와 같은 법철학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면권이 인정되어온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나 통치권이 실정법의 테두리를 넘어서 작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온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만큼 사면권은 예외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만큼 신중하게 행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법에 규정되어 있다고 대통령에게 당연히 주어진 권한이라고 간주해 임의적으로 남용하는 것은 사면권의 본래 취지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어 사면권의 주체인 국가와 대통령의 법적 지위까지 위험하게 만드는 독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인 “비자금 등 불법 행위 엄벌, 특사는 없다”

사면 논란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한나라당 이한구 정책위의장의 발언도 대통령의 사면권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지난해 12월29일 있은 이명박 당선인과 재계 총수들과의 회동을 설명하면서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어 출자총액제 등 규제를 대폭 해제하되 비자금 등 글로벌 스탠다드에 어긋나는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엄벌하겠다”라는 것이 이당선인의 생각이라면서 “실컷 불법 저질러 놓고 또 휠체어 타고 나오고 이런 식으로 하면 기반이 무너진다. 사법부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고 대통령이 쓸데없이 자꾸 특별 사면 안 하고 이러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했다.
그의 발언은 기업 환경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개선하면 기업의 행위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아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것이며 이와 동시에 비록 이명박 당선인이 ‘친기업’이기는 하지만 기업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엄격할 것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서, 위의 언명에서도 대통령 사면권은 예외적으로 신중하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한구 정책위의장의 발언에서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단호한 대처 원칙이다. 화이트칼라 범죄는 ‘사회의 각 방면에서 관리적·지도적 입장에 있는 자가 직무상의 지위를 이용하여 직무과정에서 범하는 범죄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이트칼라 범죄는 ‘일정한 권한이나 지위를 남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다는 특색이 있으며, 보통 계획적이고 교묘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피해도 상당히 크다. 국가 경제를 혼란시키며 정치 행정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기업, 국민이 피해자라는 점에서 피해의 파급이 간접적이고 피해 감각이 잘 환기되지 않는 반면 가해자 쪽도 살인·강도를 범하는 것과 같은 죄의식을 잘 느끼지 않는다. 사건 처리도 위법·합법의 구별이 어려워 형사 문제로서 다루어지지 않거나 범죄를 입증할 증거가 인멸되어 소추가 어렵고 통상 범죄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기 때문에 정치적 고려에 의해 기소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사전적 설명만으로도 화이트칼라 범죄가 국가 신뢰의 위기를 가져오는 주범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일반 국민으로 하여금 ‘유전무죄, 무전유죄’ 더 나아가 ‘유권무죄, 무권유죄’를 절규하면서 법 앞에서 좌절하게 만드는 것도 이들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의 교묘한 ‘법망 빠져나가기’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대통령의 사면권이 유력 정치인, 고위 공무원, 기업인, 측근 인사 등 대표적인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남발된다면 일반 국민이 느끼는 좌절감의 정도는 어떠하겠으며 그로 인한 국가 신뢰의 추락은 또 어떠할 것인가.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노무현 대통령의 12월31일 사면권 행사는 ‘경제 회생과 국민 통합을 위한 통치권 차원의 결단’이라기보다는 다수 국민의 상대적 박탈감을 고조시켜 국민 통합을 해치고 그로 인해 경제 회생을 저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법의 안정성까지 흔들 수 있는 사면권의 남용으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인 법의 생명은 형평성에 있다. 재산, 성, 세대, 인종, 종교 등의 차이가 법의 형평성을 해치게 되는 순간 법은 사회 질서의 유지라는 본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누구도 법에 승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법의 권위가 훼손되면 법에 의거해 존립하는 현대 법치 국가는 곧바로 신뢰의 위기에 노출된다. 그리고 신뢰의 위기가 만성화되면 국가는 그 존립 근거를 잃게 된다. 국가 존립과 안전을 위해 예외적으로 행사되어온 사면권이 국가 존립의 근거를 허물어뜨리는 부메랑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면권이 극히 예외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행사되어야만 되는 이유이다. 새 정부는 사면권의 진정한 뜻을 잘 살펴 법치주의도 강화하고 대통령의 통치권도 강화하는 현명한 선택을 해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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