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의 허기 바람으로 불다
  • 김유미 (연극평론가) ()
  • 승인 2008.01.0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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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바람의 욕망>, 중년 여성 사랑·좌절 실감나게 그려

 
산울림의 공연 중에는 산울림표 여성 연극이라고 불릴 만한 일련의 연극들이 있다. 그러한 이름의 기점이 된 것은 아마 1986년 <위기의 여자>일 것이다. 아줌마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모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객층 개발의 의미가 있었던 만큼 이후로 산울림에서 공연되는 여성 연극에는 브랜드 네임의 가치가 일정 정도 형성되었다. 박정자, 손숙, 윤석화 등 연극계를 대표하는 유명 여배우들과 관록 있는 연출가 임영웅의 조합은 관객들의 기대치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요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안정된 레퍼토리로서의 순기능보다 리모델링 욕구를 자극하는 낡은 것, 혹은 뻔한 것이라는 역기능으로 인식될 위험도 없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공연 <바람의 욕망>은 전환의 계기가 필요한 산울림 극장에 활력을 주는 작품이 되기에 충분했다. 산울림 여성 연극의 명성을 이어가면서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바람의 욕망>은 기존의 산울림 여성 연극들이 주로 번역극이었던 것과 다르게 창작극이다. 창작극의 장점은 무엇보다 우리의 현실에 밀착할 수 있다는 점일 텐데 그 부분에서 관객에게 훨씬 현실감 있게 다가올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쓴 김명화는 젊지만 연극계에서 전방위로 활동하면서 그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작가이다. 지난 가을에 제1회 차범석 희곡상을 수상했다는 공적인 경력도 김명화의 역량을 입증해주는 자료가 된다.
그러므로 젊지만 가볍지 않은 작가의 창작극이라는 범주는 산울림의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시도를 위한 매우 적절한 선택이라고 여겨진다. 그동안 너무 그림같이 한 장소에 머물렀다는 느낌을 주는 산울림의 여성 연극이 큰 보폭으로 활달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한층 젊어졌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얼핏 보기에 요즘의 트렌드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중년 여자와 젊은 남자의 사랑은 최첨단의 시류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것만으로도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최첨단으로 치닫는 작품이 아니다.
 

‘산울림’표 여성 연극의 새로운 모색

이것은 어쩌면 이 시대에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정면으로 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법으로 동성애를 은유적으로 활용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사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최신식 남녀 간의 사랑, 그 스타일이 아니라 어떤 사랑이든 그것이 지닌 본질적 문제, 진실에 대한 탐색에 더 가깝다.
이 작품은 일차적으로 50 나이를 바라보는 여자와 갓 서른인 남자의 사랑이 대단히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도발적으로 보이는 사랑이 그 흔하디 흔한 중년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랑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중년 여자의 경우 자신의 사랑을 사랑이라기보다는 바람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중년 남성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짖는 것과 대조된다. 여기에서 어떻게 남자와 여자의 경우가 같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이 작품을 보고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 될 정도로 중년 여자의 사랑은 중년 남자의 사랑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왜 중년 여자의 사랑만 문제가 되는 거야?”라는 다소 진부한 페미니즘적 시각에서의 질문에 이보다 더 명쾌한 대답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 작품은 명답을 제시한다.

중년 여성도 영계를 좋아한다

이 작품이 두 번째로 말하고자 하는 점은 남자와 똑같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당당한 여성은 젊은 남자를 사랑할 만한 자격이 부여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남자에게 허용되었다면 여자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부여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가장으로서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다가 중년에 이르러 새로운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남성들에게 보냈던 동정적 시선을 여성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신 아무개씨와 변 아무개씨의 사건을 떠올리지 않아도 그 동정적 시선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 ‘그녀’(손봉숙) 역시 사회적으로 성공한 방송작가로서 가장처럼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자 아이들과 남편을 외국으로 보내고 그 뒷바라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같은 조건이라면 양성 평등의 관점이 공평하게 적용될 수 있고 그 대답도 간단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어느 한 쪽 편에서 답을 마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이 중년 여성의 사랑을 문제 삼고 있음에도 중년 남자들의 영계 선호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영계 특수 현상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젊은 남자와 연애한 대가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망신살의 고통을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에 비유해 과장함으로써 그 현실감을 구체적으로 전달해 우리의 속물성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여자 주인공이기에 가능했던 솔직함이기도 한데 그것을 목도하는 관객은 그 솔직함으로 인해 자기 내면을 거침없이 들여다보게 된다. 여기서 반성과 카타르시스와 해방감,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오묘하게 절정을 만들어낸다. 멋있게 지포라이터를 켜던 그녀가 한순간에 성냥팔이 소녀로 뒤바뀌는 변화가 가장 인간적이었으며 그 순간에 그녀는 사랑 이상의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이 굳이 여성 편을 드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녀의 깨달음의 방식이 귀엽고 매력적이었다는 점에서 여성만의 장점이 잘 살아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살려 더욱 경쾌한 작품으로 거듭날 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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