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말고도 문제 될 기업 많다”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 승인 2008.01.2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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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채업자가 밝힌 차명 계좌 실상 “ㄱ그룹, 계열 저축은행 통해 차명 거래”

 
'차명, 차명 하니까 고도의 수법이 동원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차명 계좌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차명 거래는 자체가 불법이지만 돈이 많든 적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근본적인 원인은 금융권의 잘못된 영업 관행에 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에서는 여전히 차명 거래임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아예 부추기는 경우도 있다.”
지난 1월15일 서울 모처에서 만난 한 사채업자 ㅇ씨의 말이다. 그는 아직도 성행하고 있는 차명 거래의 실태와 문제점을 상세하게 꼬집었다. 그는 은행이나 증권사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실적을 높이기 위해 차명 계좌 개설을 사실상 방치하거나 경우에 따라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명의로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창구에 위임장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은행 직원과 조금만 친분이 있어도 이같은 번거로운 과정은 얼마든지 생략할 수 있다. 오히려 일부 은행이나 증권사는 실적을 높이기 위해 확인 절차 없이 차명 계좌를 개설해주고 있다.”
실제로 이 사채업자는 그동안 적지 않은 차명 계좌를 만들어 운영해왔다. 그러나 한 번도 제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사망한 사람의 계좌까지 차명 거래에 도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방식은 워낙 은밀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외부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별도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로 사망자 명의 계좌가 최근 차명 거래용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망자 명의 계좌, 고가에 거래되기도

가격도 일반 휴먼 계좌나 노숙자 명의 계좌보다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유가족이 금융 당국에 별도의 확인 요청을 하지 않는 한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계좌 주인이 사망하면 은행에 자동으로 통보되어야 하는데 현재 시스템은 그렇지 않다. 유가족들이 상속 재산을 찾기 위해 금감원에 ‘피상속인 금융 자산 조회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으면 계좌 자체가 차명인지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같은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 죽은 사람의 계좌가 은밀히 거래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지난 2003년 터진 현대 비자금 사건 때도 사망자 명의 계좌로 비자금을 관리한 사실이 드러나 눈길을 끌었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비자금 관리인으로 지목된 김영완씨는 당시 100여 개의 차명 계좌를 이용해 수백억대 자금을 운영한 것으로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김씨는 노숙자 명의나 휴면 계좌뿐 아니라 사망자 명의 계좌까지 사용했다.
추적이 쉽지 않은 무기명 채권이나 양도성예금증서(CD) 또한  재산 은닉이나 비자금 조성에 유용한 수단으로 쓰인다.
ㅇ씨는 “무기명 채권이나 CD는 처음 발급받은 사람과 마지막에 찾는 사람만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중간에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특히 채권은 CD와 달리 만기일이 길다. 때문에 20년 만기 채권을 사채 시장에서 교환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인 재용씨도 지난 2006년 이같은 방법을 사용하다 검찰에 덜미가 잡혔다. 당시 재용씨는 1998년 발행된 증권금융채권을 많이 갖고 있었다. 이 채권은 외환위기 직후 정부가 지하 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한시적으로 발행한 비실명 채권이다. 때문에 보유자에 대해 자금 출처를 묻지 않았다. 상속세와 증여세도 면제된다. 재용씨는 감시의 눈을 피해 은밀히 채권을 회수하다 검찰 레이더에 걸려들었다.
이렇듯 차명 거래는 더 이상 특정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차명 계좌를 만들 수 있다. 삼성그룹이 수천 명의 그룹 임원을 통해 차명 계좌를 만든 것도 이같은 제도적 허점과 금융 기관의 암묵적 방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이 사채업자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그는 삼성뿐만 아니라 웬만한 기업들도 상당수 차명 계좌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견 기업인 ㄱ그룹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회사는 최근 인수·합병을 통해 급성장했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상당수의 차명 계좌가 만들어져 활용되었다는 것이 ㅇ씨의 주장이다. “계열사 인수·합병 작업에 내가 일부 가담했기 때문에 전말을 잘 알고 있다. 계열사인 ㄴ상호저축은행을 통해 회장 측근이나 가족 이름의 차명 계좌가 많이 만들어졌다. 현재도 일부 계좌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이 회사의 주주 중에는 그룹 회장의 주치의나 처가 쪽 가족, 협력사 사장, 심지어 직원들의 부인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거액의 자금이 그룹 차원에서 빼돌려져 비자금의 형태로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으로 그는 추정하고 있다.
이런 의혹에 대해 해당 주주들은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순수한 투자에 돈이 들어갔을 뿐이지 별도로 빼돌린 것은 없다는 것이다. ㄱ그룹측도 “직원 부인 계좌에 주식을 넣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차명 계좌가 아니라 합법적인 관리 계좌로 세무서 신고까지 마쳤다. 그동안 여러 차례 세무 당국의 조사를 받았지만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ㅇ씨의 설명은 다르다. 세무조사 과정에서 오너 일가의 차명 계좌가 여러 개 나왔지만 해당 시점이 5년 전이어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채 시장 통해 차명 증권 계좌도 양산돼

그는 “ㄱ그룹의 경우 5년을 넘겼기 때문에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기업의 경우 이같은 면책 요건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수사 기관의 노력 여하에 따라 문제를 삼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사채 시장을 통해 차명 증권 계좌가 양산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자금력이 약한 코스닥 기업에서 자주 이용한다. 요컨대 기업은 사채업자에게 특정 기업의 주식을 담보로 거액을 빌린다. 통상적으로 이자는 월 5~10% 정도이며 선불을 원칙으로 한다. 사채업자는 담보로 받은 주식을 자신의 계좌로 이체시켜 차명 주식 계좌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ㅇ씨는 최근 계약을 체결한 한 사채 업체의 ‘매매 담보 대출 약정서’를 그 사례로 제시했다.
“채무자가 대출한 돈을 모두 상환하면 이 차명 계좌는 휴지조각이 된다. 그러나 상환을 하지 못할 경우 복잡해진다. 차명 계좌를 이용해 기업을 사고 파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이로 인한 폐해나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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