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환자 5천만명을 유치하겠다고?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 승인 2008.01.2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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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병원협회, 대통령직인수위에 ‘꿈같은’ 프로젝트 제출해 물의 중소·지방 병원 살리겠다며 미국 극빈층 무료 진료도 계획…의료계 “어이없다”

 
대한병원협회가 미국에서 환자 5천만명을 국내 병원으로 유치하는 ‘5천만 프로젝트’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제출해 의료계가 술렁이고 있다. 병원협회에 따르면 미국 인구 3억명 중 공보험과 사보험을 들지 않아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된 빈민층이 5천만명에 이른다. 이들을 우리나라 병원으로 유치해 명분을 살리고 실리도 챙긴다는 것이 이 방안의 핵심이다.
미국은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감당하지 못하는 소외 계층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우리나라는 국내 의료기술의 국제적 홍보와 함께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병원협회의 판단이다. 병원협회의 서석완 기획조정실장은 “‘5천만 프로젝트’를 포함해 의료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방안을 지난 1월18일 인수위에 제안했다. 새 정부가 이를 추진해줄 것으로 믿는다. 만일 정부 차원에서 추진되지 않으면 병원협회 차원에서라도 추진하겠다. 우리는 의료비가 미국보다 저렴하면서 품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다. 이 프로젝트가 잘 이루어지면 외국 환자 유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료계의 시각은 엇갈리고 있다. 의료 시장 개방을 앞두고 의료계가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소리도 있다. 보건복지부 임종규 정책팀장은 “우리나라 의료계 수준을 세계에 알리고 의료서비스를 외국 환자에게도 제공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 프로젝트는 필요하다. 5천만명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이고 그보다 적은 수라도 우리가 외국 환자를 유치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잘 다듬어 추진하면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 의료계가 국제 경쟁력 가질 계기”

이런 판단이 나온 것은 태국·인도·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인 환자 유치에 나선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보다 의료기술과 서비스 수준이 낮은 태국의 경우 연 100만명의 외국 환자를 유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난해 34개 병원에서 1만5천명을 유치하는 데 그쳤다. 이에 대해 한국보건진흥원 이영호 해외마케팅지원팀장은 “태국의 경우를 조사해보니 마사지·안마·스파 등을 받은 관광객까지 의료 서비스를 받은 환자로 집계했다. 따라서 100만명은 부풀려진 수치이다”라고 말했다. 한국보건진흥원은 지난해부터 34개 민간병원으로 구성된 한국국제의료서비스협의회를 추진하고 있다. 자비로 우리나라 의료기관을 찾는 외국 환자들을 확보하는 사업이다. 한국보건진흥원 이팀장은 “앞으로 나라별로 다른 마케팅을 펴서 더욱 많은 외국 환자를 유치할 계획이다. 예를 들면 중국 등 개발도상국에는 고급 의료 서비스 제공을 앞세운 마케팅을 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병원협회는 외국 환자를 유치한 후 대형 종합병원이 아니라 중소 병원과 지방 병원에 배분할 계획이다. 병원 가동률이 60~70% 밖에 되지 않는 중소 병원과 지방 병원을 살리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대형 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리는 쏠림 현상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 병원들은 병원협회측의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경상북도에 있는 한 지방 병원은 “계획은 좋으나 외국 환자를 진료하려면 언어 문제는 물론 미국과 전혀 다른 우리나라 진료 시스템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매우 오랜 기간을 두고 추진할 문제이지 섣불리 시행할 정책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 경기도의 한 중급 종합병원은 “지방 병원도 이미 가동률이 높다. 우리 병원만 해도 92%에 달한다. 외국 환자까지 염두에 둘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한국보건진흥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의료 수준은 미국의 87% 정도이다. 이 정도면 미국의 소외 계층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이 의료계의 보편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굳이 이들을 우리나라 병원으로 유치하면 과연 이득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 빈민층은 외면한 채  외국 빈민들 치료?

실제로 외국 환자들을 우리나라로 유치하기 위해 파격적인 진료비 체계를 적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협회가 마련한 세부 내용에 따르면 미국의 의료소외계층을 3개 군으로 나눠 연소득 6만 달러 이상인 7백50만명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의료수가에 준하는 치료비를 받는다. 그 이하는 일정액의 진료비를 감면해주며, 극빈층에 대해서는 진료비 전액을 감면해준다.
또 항공료와 국내 체재비를 무료로 한다는 것이 병원협회의 계획이다. 환자 수송은 국내외 항공사의 후원을 받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미군의 운송 수단을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입원비는 해당 병원이 부담하게 하고 부족한 부분은 보험사 등 기업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충당하겠다는 것이다. 병원협회 서실장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진행하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료계 발전을 위해 기업들이 후원할 것으로 본다. 또 외국 환자 가족들도 함께 우리나라를 찾는 만큼 관광·문화 분야에서 부대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지방 병원 관계자는 “굳이 항공료와 체재비까지 기업과 병원이 부담해가며 외국 환자를 데려올 필요가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그리고 독거 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 등 우리나라 빈민층은 외면한 채 외국 빈민층만을 위해 진료 활동을 하느냐는 비난을 받을 소지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외국 환자를 유치하는 에이전트 활동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병원협회는 주장한다. 외국 환자 유치 에이전트는 외국의 환자를 모집해 국내 병원으로 소개해주는 일종의 중개인이다. 미국의 경우 에이전트는 병원에 환자를 유치해주고 총 진료비의 10~15% 정도를 수수료로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행 의료법상 환자의 유인·알선 행위는 불법이다. 병원협회 서실장은 “외국 환자 유치를 위한 홍보가 전면 차단되어 있다. 우리나라 의료계를 살리고 의료 수준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외국 환자 유치 에이전트가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경우 무엇보다 의료 사고에 대한 대비가 철저해야 한다는 지적도 새겨야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병원 유태우 교수는 “만일 의료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먼저 대안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거의 무료로 그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셈인데 과연 우리나라와 기업들에게는 어떤 혜택이 있는지 세부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현재로서는 반짝 하는 이벤트성 정책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미국 민주당 대선 주자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자국의 소외 계층에 대한 의료 혜택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만일 힐러리 상원의원이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될 경우 병원협회의 제안은 미국측 이해와 맞아떨어지면서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 보험사와 언론의 반응이다. 미국의 일부 병원을 소유하고 있는 보험사들이 이 제안을 곱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또 의료 강국인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미국 언론의 비판이 제기될 경우 프로젝트는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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