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가만히 계세요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 승인 2008.01.2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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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상담사 인기 상종가…‘확 열린’ 외국계 은행, ‘꽉 막힌’ 국내 은행 누르고 ‘펄펄’

 
“은행이 구멍가게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대기업 부장인 김 아무개씨(48)의 말이다. 그는 최근 펜션 부지 매입용 자금을 빌리기 위해 한 은행 지점을 방문했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은행측이 돌연 예정된 대출 일자를 연기하겠다고 자신에게 통보한 것이다.
정부가 최근 은행권의 주택담보 대출을 규제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김씨도 익히 들은 바 있다. 그러나 자신의 대출은 이 경우와 다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본점에서 이미 대출 승인을 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정된 날짜에 대출받을 돈을 찾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행이 갑자기 대출 일자를 미루어 펜션 계약에 차질이 빚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창구 직원은 “본점에서 대출을 모두 중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 납득할 만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급하게 만난 사람이 한 외국계 은행의 대출 상담사였다. 그가 자신의 현재 상황에 맞는 상품 추천에서부터 서류 접수를 원스톱에 처리해준 덕분에 김씨는 겨우 예정된 날짜에 계약을 마칠 수 있었다.
김씨는 “은행이 구멍가게도 아닌데 이미 승인이 났고, 담보에 대한 대출 액수까지 정해진 상태에서 대출을 미룬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이 은행이 최근 적지 않은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창구 직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현금 지급준비율(이하 지준율)을 맞추는 과정에서 자금이 모자라자 이미 대출 승인이 난 것을 포함한 신규 대출을 일시 중지해버린 것이다.
이같은 문제는 현재 이 은행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 은행들이 자금난을 겪고 있다 보니 지불준비율을 맞추는 과정에서 대출을 연기하거나 중단했다. 이로 인해 금감원 등 관련 기관에는 민원이 쇄도하기도 했다.

시중 은행들 ‘돈가뭄’에 대출 연기 해프닝 속출

이렇듯 시중 은행들이 정부의 대출 규제로 후유증을 심하게 겪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펀드 등으로의 자금 이탈이 가속화하면서 자금난이 심화되고 있다. 급한 대로 CD나 은행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묘연하다. 오히려 무절제한 채권 발행이 금리를 올려 경영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 은행들이 금융 당국의 규제에 맞춰 대출 창구를 막아놓고 있는 사이에 외국계 은행들은 파상 공세를 벌이고 있다. 신용대출 한도를 연봉의 세 배까지 늘리는 것은 기본이다. 연 5.99%의 파격적인 주택담보 대출 상품을 내놓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도 펼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출 상담사’라는 직종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대출 상담사란 보험 설계사와 유사한 개념이다. 창구에서 대출 고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대출 고객을 찾아 현장으로 다니기 때문이다. 고객 입장에서 보면 반가운 존재이다.
실제로 지난 2000년 4월 처음으로 대출 상담사 제도를 도입한 HSBC은행의 경우 현재 수백명 이상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은행측은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구체적인 수치 공개를 꺼리고 있다. 그러나 대출 상담사 제도를 적극 활용해 은행 전체 신용대출액의 20%를 대출 상담사가 처리했을 정도이다.
HSBC은행 홍보팀 이한나 과장은 “외국계의 경우 국내 은행과 달리 지점망이 많지 않다. 때문에 대출 상담사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부동산 담보 대출을 규제하고 있는 현 시점에도 전년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신용대출의 경우 전년 대비 20% 이상 늘었다”라고 설명했다.
SC제일은행, 시티은행 등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대출 상담사들을 활용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SC제일은행 장필경 팀장은 “현재 운영 중인 대출 상담사만 6백여 명에 달한다. 구체적인 운영 방향은 연초 계획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최근의 상황 타개를 위한 다양한 활로를 고민 중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대출 상담사의 경우 비교적 빠르게 육성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은행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3개월여 교육을 받으면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다. 때문에 국내 영업망이 부족한 외국계 은행을 중심으로 대출 상담사가 각광을 받고 있다. 
물론 국민은행, 우리은행 등 국내의 주요 은행들도 대출 상담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유명무실하다. 국민은행의 한 관계자는 “국내 은행의 경우 영업점이 많아 대출 상담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억대 연봉을 받는 대출 상담사도 속출하고 있다. HSBC은행 이한나 과장은 “지난해 20명 정도가 억대 연봉을 받았다. 이 중 상당수는 일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사람들이다”라고 귀띔했다. 때문에 이들은 은행에서 별도로 관리 중이다. 해당 은행들은 이른바 ‘VIP 상담사’와 ‘일반 상담사’를 차별하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은행 수익에 미치는 영향력이 워낙 커 각별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자는 어렵게 한 대출 상담사와 만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HSBC은행의 심영철 대출 상담사이다. 이 은행에서 그는 ‘전설’로 통한다. 일을 시작한 첫해에 억대 수익을 올리며 신인상을 받았다. 2년차 때는 수익 1등에게 주어지는 ‘톱 퍼포머’ 지위에 올랐다.

 

은행별로 VIP 상담사 별도로 관리하며 최고 대우

심씨의 주요 고객 중에는 이른바 ‘사’자 직업 종사자들이 많다. 일반 직장인도 있지만 검사, 변호사, 세무사, 의사, 약사, 교수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대다수이다. 심지어 시중 은행원들 중에도 그에게 대출을 문의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들을 통해 지난 2년여 동안 대출이 성사된 건수만 4백 건이 넘는다. 실질적인 영업 일수가 20일 정도임을 감안할 때 하루에 1명씩 대출을 성사시킨 셈이다. 덕분에 그는 지난해 1억8천만원의 연봉을 받았다고 한다.
심씨는 “은행들이 최근 대출 한도를 낮추고 있다. 그러나 외국계 은행의 경우 신용 한도가 높기 때문에 추가 대출을 문의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때는 고객의 직장 동료가 상담전화 이야기를 듣고 대출을 신청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알고 보니 그도 정통 ‘금융맨’은 아니었다. 11여년 간 자동차 회사 영업기획 파트에서 일하다가 대출 상담사가 된 경우이다. 그런 그가 단기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근의 금융권 분위기도 그가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심씨는 “정부는 향후에도 금융권 대출을 계속 옥죌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 인해 대출 상담사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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