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넘쳐나는데 의사가 없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 승인 2008.02.1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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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주요 병원 ‘암센터’ 속속 개원…암 전문의 구하기 ‘비상’

 
최근 대형 종합병원들이 앞 다투어 암센터를 설립하면서 병원마다 암 전문의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국립암센터를 비롯해 종합병원들의 암센터는 올해 6곳이 더 세워져 모두 10곳으로 늘어나고, 앞으로 3년 내 15곳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처럼 암센터가 생겨날 경우, 병상 수는 어림잡아도 4천5백~5천개가 넘는다. 환자 입장에서는 반길 일이지만 종합병원들에게는 암 전문의 확보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암 전문의 확보 경쟁은 삼성서울병원이 몰고 왔다. 삼성서울병원은 착공 4년만인 지난 1월 삼성암센터를 개원하면서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점을 강조했다. 면적 11만㎡(3만3천여 평)에 병상 수도 일본국립암센터(6백개)보다 많은 6백52개이다. 개원에 앞서 삼성서울병원은 전문의 14명을 미국으로 장기 해외 연수를 보내는 등 자체 인력으로 일부 암 전문의를 충당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종합병원 암 전문의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의료계에 따르면 삼성암센터는 외국 유명 암센터 연수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시하며 상당수의 종합병원 암 전문의들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삼성암센터로부터 제안을 받지 못한 의사는 암 전문의가 아니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특히 국립암센터 암 전문의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예 국립암센터 유근영 원장을 영입하려 했으나 그의 고사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대신 위암 분야의 권위자인 배재문 전 부원장이 지난해 12월 삼성암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이밖에 지난해 국립암센터에서 이직한 암 전문의 10명 중 절반이 삼성암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국립암센터 정인철 홍보팀장은 “성균관대 총장과 삼성서울병원장이 지난해 국립암센터를 방문하면서 원장을 비롯해 여러 암 전문의들과 접촉한 것으로 안다. 이후 대학병원 교수라는 타이틀을 선호하는 암 전문의들이 자리를 옮긴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삼성암센터 개원을 계기로 다른 종합병원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기존 암센터를 확충하거나 신규로 설립하고 있다. 1969년 국내 최초로 암센터 간판을 내걸었던 세브란스병원 연세암센터는 2011년 개원을 목표로 낙후된 편의 시설과 외래진료실 등을 보수·확충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도 내년 각각 암센터를 개원한다.
암센터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병원 입장에서 암센터가 수익의 원천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종합병원의 환자 10명 중 4~6명이 암환자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국립암센터 신상훈 신경외과 전문의는 “암센터 설립 배경에는 투자 대비 수익이 도사리고 있다. 다른 질병과 달리 암은 진료 기간이 길고, 각종 검사·치료·약제비가 비싸기 때문에 병원 경영 측면에서는 매력적인 질환이다. 현재 연간 12만~15만명의 암환자가 발생하고 6만여 명이 암으로 사망한다”라고 설명했다.
또 난치병인 암을 잘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은 곧 환자들 사이에서 명의(名醫)가 있는 병원으로 인식된다. 병원 이미지 제고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첨단 장비는 사기 쉬워도 전문의는 모시기 힘들어

암 진단과 진료에 필요한 첨단 장비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지만 암 전문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 일부 종합병원들은 암 전문의들의 이합집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국립암센터 신상훈 전문의는 “의사들 사이에는 뿌리 깊은 도제(徒弟) 교육이 크게 작용한다. 진료에서 수술까지 철저하게 선임 의사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도제 교육을 무시할 만한 의사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 제자가 스승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설사 그렇게 한다면 영원히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암 전문의가 자리를 이동하더라도 극소수일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연세의대 연세암센터 김귀언 원장은 “인력의 대거 이동은 어려울 것이다. 주니어 의사는 몰라도 어느 수준급 암 전문의가 이동한다면 옮겨간 암센터의 텃세 때문에라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극소수의 암 전문의가 이른바 스타급 전문의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비슷한 조건을 갖춘 병원일 경우 환자에게는 명의가 곧 병원의 선택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카톨릭의대 강남성모병원 배석호 홍보팀장은 “내년 5월에 개원하는 서울성모병원 내에 고형암·여성암·혈액암 등 3개 암센터를 설치할 계획이다. 여러 루트를 통해 암전문의를 확보하겠지만 상징성이 있는 극소수의 스타급 암 전문의가 중요하므로 각별한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삼성암센터는 최고 암 전문의를 확보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심영목 삼성암센터장은 “의사가 병원을 옮기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이다. 기존 병원에서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불만이 있을 경우 개인 의지에 따라 자리를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수준 있는 암 전문의를 확보하고, 그들을 베스트 중의 베스트로 키워나갈 계획이다”라고 설명했다.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붙은 삼성암센터가 직·간접으로 암 전문의 확보에 적극 나서자 다른 종합병원들은 집안 단속에 부심하고 있다. 소속 암 전문의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각 종합병원은 자신들의 강점을 부각시키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연세암센터는 국내 최초 암센터라는 점과 연세의대의 자부심을 강조했다. 연세암센터 김귀언 원장은 “암 진료는 다른 질병과 달라 하루아침에 노하우가 쌓이는 것이 아니다. 40년 노하우를 쌓은 연세암센터와 최근 생긴 암센터를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이곳 암 전문의들은 연세의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강해 자리를 이동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국립암센터 정인철 홍보팀장은 “국립암센터는 진료 외에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훌륭하다. 또 종합병원과 달리 이곳에서는 주니어 의사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다”라며 다른 병원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무늬만 암센터’ 난립할 가능성도 있어

그럼에도 암 전문의 스카우트 경쟁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암 전문의 확보가 암센터 존립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삼성암센터 심센터장은 “안과나 피부과처럼 바로 가시적인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암 전문의의 길을 걸으려는 의사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또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기피 현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암 전문의가 절대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또 정부의 암 정책을 시행하는 국립암센터가 앞으로 국내 암센터들의 역량을 평가해 공개할 계획이어서 병원 간 암 전문의 확보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암 전문의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채 암센터만 늘어날 경우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서울대병원 허대석 암센터장은 “사실 암 전문의라는 기준이 정해진 것은 없다. 내과의 경우 종양학을 전공한 의사를 암 전문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외과의 경우에는 뚜렷한 잣대가 없다. 암 관련 진료·수술을 많이 해 경험이 많은 의사를 암 전문의라고 여기는 정도이다. 이 때문에 종합병원과 암센터에 양다리를 걸친 의사들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반 외과의사이면서 암 수술을 한두 번 해본 경험을 내세워 암 전문의로 활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자칫 암 전문의가 없는, 무늬만 암센터가 난립할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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