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 원로 그룹, 소장파 밀치고 ‘인사 카드’ 손에 쥐었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 승인 2008.03.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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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이 출범 초부터 삐끗했다. 장관 후보자의 20%가 청문회에 서기도 전에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민심은 와글와글 끓고 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장관과 청와대 수석으로 내세웠느냐는 비판이 봇물 터졌다. 의혹도 가지가지이다. 땅 투기는 보통이고 위장 전입, 이중 국적, 논문 표절, 군사 정권 협력까지 가히 백화점 수준이다.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도 “이것은 아니다”라며 고개를 흔들고 있다.
정권 초에 불거진 이번 ‘인사 파동’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추진력을 상당 부분 잃었다. 또한 이번 사태는 향후 여권 내부의 역학 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실세들 간 권력 투쟁이 본격화하는 것은 물론 한나라당과 청와대의 관계에도 일대 변화가 올 가능성이 크다. 4·9 총선이 발등에 닥친 상황이기 때문에 당장 가시화하지는 않겠지만 여권 내부에 이런 부분이 깊게 내연하면서 갈등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권력 충돌은 총선 이후 7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전면화하며 여권의 세력 구도가 전면 재편되는 수순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인사 파동’ 막후에 어떤 일이 있었고, 왜 이런 ‘엉터리’ 인선이 나온 것일까.

“정두언, 대통령 꿈꾼다” 얘기에 이대통령 “인사에서 손 떼라”

지난 1월11일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이 예고 없이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에 나타났다. 1주일 넘게 기자들의 전화를 일절 받지 않던 그는 이날 인사와 관련해 기자들과 문답을 나눴다. “지난 정권에서 차관 이상 지낸 사람 중 장관 후보가 있는가?” “없는 것 같다.” “국무총리 인선 작업을 끝냈나?” “지난주 후보자군을 당선인에게 보고했다.” 이때만 해도 정의원은 당선인 비서실에서 인사 관련 업무를 맡고 있었다.
1월25일 정의원은 다시 인수위를 찾았다. 2주 만이었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제대로 검증하려면 보름 정도는 걸린다. 빨리 하면 리스크가 크다. 교수들의 경우 논문을 다 본다는 것인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느냐?” “국회의원들 가운데 배지를 던질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기자들이 전화를 많이 하는데 사실 나는 아는 게 없다는 것을 고백하러 왔다.” 이날 정의원의 태도는 인사 작업을 총괄하는 주체가 아니라 가까이서 지켜보는 ‘관전자’ 입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 2주 사이에 정의원은 인사 작업에서 손을 뗐다. 그는 내각과 청와대 수석 후보들을 3배수까지 압축한 상태였다. 이후 인사 작업의 실권은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이 쥐었다. 경북 출신인 박비서관은 이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을 11년간 보좌했고 서울시 정무국장을 지낸 ‘서울시 그룹’의 맏형이다. 주체가 바뀌니 자연히 인사의 방향과 흐름이 바뀌었다. 정두언 의원이 그렸던 그림은 헝클어졌다. 정의원의 말과 달리 현역 의원인 박재완·이주호 의원이 배지를 던지고 청와대에 입성했다. ‘한승수 총리’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수석’ 카드도 급부상했다.

 
정두언 의원은 왜 인사 실무 작업에서 밀려난 것일까. 여권의 한 정통한 관계자는 “정의원은 차기 대통령이 되기 위해 자기 사람을 심고 있다는 모함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이대통령에게 이런 내용이 보고되었고 대통령이 정의원에게 인사 작업에서 손을 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인수위 명단이 발표되면서 정의원과 관련 있는 인사들이 대거 인수위에 진출했다는 보도가 잇달아 나온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당시 인수위에는 김준경 전 한국개발연구원 부원장과 이용준 전 북핵담당 대사, 최중경 세계은행 이사 등 정의원의 경기고 동기와 행정고시 동기들이 여럿 진출했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정가에 나도는 소문도 주목된다. “호남 인사들이 정의원을 도와 그가 이번 총선에서 전국 최고 득표를 해 대권에 나서도록 돕는 대신 정의원이 호남을 돕기로 했다”라는 것이다. 실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맥락은 앞 관계자의 언급과 일치한다.
주체가 바뀌면서 인사는 크게 흔들렸다. 인사에서 철학과 감동이 사라지고 측근·정실 인사가 자리 잡았다. 지역 배려나 전문성 여부도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인재풀은 극도로 협소화되었고 아는 인맥 가운데서 사람을 뽑아 쓰는 쪽으로 몰렸다. ‘능력이 중요하다’라는 인식은 도덕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 필요성을 가벼이 여기게 했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내각과 청와대의 인선 과정은 한마디로 ‘소장파에 대한 원로 그룹의 승리’였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박영준 비서관이 인선 파동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실무는 그가 했겠지만 당 주변에서는 이상득 국회부의장에 주목하는 시각이 많다”라고 전했다. 소장파들은 공천과 관련해서도 ‘개혁공천을 하기 위해서는 이상득 부의장을 쳐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부의장은 출마를 선언하며 소장파들을 압박했다. 이부의장은 청와대 인선에서도 측근인 장다사로 비서실장을 정무1비서관에 진출시키는 등 직·간접으로 간여했다.
반면 정두언·박형준 의원과 가까운 인사들은 청와대에 진출하는 데 실패하거나 진출했더라도 한직으로 밀렸다. 정무·민정 분야에 이들 소장파와 가까운 인사들은 접근할 수 없었다. ㅇ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여권의 대표적인 전략가 중 한 명인 그는 애초 3급 행정관 자리를 제안 받고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형준·이재오 의원 등이 나서서 대통령을 만나 없던 일이 되기는 했으나 정무비서관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그는, 2급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전공과는 별 관계없는 자리로 가야 했다.

 

청와대 행정관 인선도 혼선…일부는 직급도 모른 채 출근

인사 혼선은 청와대 행정관들을 선임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일부 인사들은 청와대에 근무한다는 것만 알 뿐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직급을 받는지 등도 모른 채 청와대에 출근했다. 이런 과정에서 직급에 만족하지 못한 일부 인사가 다시 청와대를 뛰쳐나오는 일도 벌어졌다. 단순한 실수였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이어진 총체적인 인사의 난맥상이었다.

 
정두언 의원은 지난 2월26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지금 진행되는 정부 인선이나 한나라당 공천은 총선에서 압승한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 아닐 수 없다”라며 인선과 공천 작업을 비판했다. 이재오 의원도 2월28일 국회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이렇게 많은 부동산과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장관을 한다면 국민은 위화감을 느낀다”라고 비판했다. 정의원과 이의원은 차이는 있지만 이번 인사 작업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고 ‘개혁 공천’을 주장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박비서관 등과 인선 작업에 참가했던 한 관계자는 “정부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가운데 빚어진 일이다. 보안을 중시하다보니 상대적으로 검증에 소홀한 점이 있었다. 이번 일이 앞으로 약이 될 것이다. 인사에는 늘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일부 관계자들은 내각과 청와대 수석들을 검증하면서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묵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사자로 알려진 한 청와대 관계자는 “지금은 아무 할 말이 없다”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번 ‘인사 파동’을 보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과연 이대통령이 국정을 잘 운영할 수 있을까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최근에는 이기수 고려대 총장과 인명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이 이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실무자들은 이대통령이 기업에서 인사하듯이 사람을 쓰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정치는 결과보다도 과정 하나하나가 다 중요한데 대통령은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만 내놓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라고 꼬집었다. 정무수석실이 있기는 하나 대통령이 얼마나 정무적인 의견을 수용하는지도 의문이다. 정책통인 박재완 정무수석은 임명 당시부터 정무수석에 어울리지 않는 인사라고 평가되었다. 힘이 실리기가 쉽지 않은 구조이다.
이대통령에게 조언했던 한 전직 의원은 “개인적인 인연을 바탕으로 사람을 쓰니 냉정하게 검증을 하지 않은 것 같다. BBK 사건이나 도곡동 땅 사건에 대해 국민이 크게 문제 삼지 않으니 대통령이 일만 잘하면 되지 도덕적인 기준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국민의 도덕적 기준과 맞지 않는 사람들을 뽑을 리가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이번 파동으로 여권의 동력은 많이 떨어졌다. 총선 의석 30~40석이 날아갔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이다. 인사 파동에 더해 영남 출신인 김성호 전 법무부장관을 국정원장으로 임명하면서 사정 기관장들이 모두 영남 출신으로 포진하는 등 ‘영남 편중’ 현상이 심화한 것도 여론을 악화시켰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여당을 견제해야 한다는 견제론이 커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 정무수석실 한 관계자는 “타격은 받았지만 총선에서 과반 이상은 확보할 것이다. 야당 지지 세력이 결집하고 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여당을 밀어주어야 한다는 흐름이 살아 있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인사 파동’ 이후의 승부는 공천에 달렸다고 본다. 물론 또 다른 인사나 정책상의 실수가 나오지 않고 권력형 비리 사건 등이 터지지 않는다는 전제에서이다. 그동안 ‘나눠먹기’라는 비판이 나왔던 한나라당 공천은 ‘이상득 변수’가 돌출하면서 출렁였다. 외부에서 온 공천심사위원들은 이부의장을 낙천시켜야 개혁 공천 모양새를 취할 수 있다며 낙천을 주장했다. 민주당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이 공천에서 원칙적인 강경 입장을 취한 것이 한나라당 외부 심사위원들을 자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나이가 많거나 대통령의 형이라는 이유만으로 낙천시켜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아 이부의장은 결국 공천을 받았다. 원로 그룹에 대한 물갈이가 어렵게 되면서 한나라당은 비례대표에서 뜻밖의 인물을 공천하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전 대표와 이대통령의 관계도 변수이다. 박 전 대표의 핵심 측근에 따르면 현재 박 전 대표와 이대통령 간 기상도는 ‘매우 맑음’이다. 이대통령이 인간적으로 여러 가지 배려를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개혁 공천’이 현실화한다면 박 전 대표측에서 피해자가 속출할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떻게 요동칠지 알 수 없다.
총선 이후 한나라당은 7월 전당대회를 계기로 크게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지금 흐름으로 보아서는 당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재오 의원과 소장파들이 연대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들 ‘범MB파’가 당권을 잡게 된다면 당-청 관계에서 당이 주도권을 쥐려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총선 이후 여권의 판도는 다시 한 번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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