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악연’이 만든 엇갈린 운명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 승인 2008.03.1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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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끈했던 동문 선후배’ 김용철 변호사·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 1996년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사 계기로 ‘균열’

“김성호 역시 삼성의 관리 대상으로 평소에 정기적으로 금품을 수수하였고 김용철 변호사가 김성호에게 직접 금품을 전달한 사실도 있습니다.”
지난 3월5일 서울 수락동 성당의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기자회견장. 예고된 대로 전종현 신부의 입에서 2차 ‘삼성 떡값’ 수수 대상자 이름이 거명되었다. 처음 언급된 인사는 이종찬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이어 두 번째로 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검찰 출신의 한 인사는 “아!” 하는 짧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는 “두 사람의 인연이 참으로 모질고 모진 악연으로 이어지는구나”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와 김용철 변호사. 검찰 주변에서는 두 사람의 13년 악연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김내정자와 김변호사가 검찰 내에서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9월이었다. 당시 김내정자는 대검 감찰과장과 중수과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서울지검 특수3부장을 맡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시 16회의 선두 주자였다. 사법연수원 9년 후배인 김변호사는 인천·대전·부산 등 지방을 거쳐 1994년 9월 서울지검에 입성했다. 보스 기질이 강하고 후배들을 잘 챙기기로 소문난 김내정자는 고려대 법학과 후배인 김변호사에게도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검찰 출신 한 관계자의 말이다.
“사실 두 사람의 성격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김내정자는 호방한 성격이었는 데 반해 김변호사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항상 인정받고 싶어했고 어떤 불이익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김내정자는 그런 ‘후배’를 특히 많이 신경 썼다. 김변호사가 없는 데서는 ‘혹시 사고 칠지도 모르니 각별히 잘 살펴야 한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김변호사 “당시 수사 확대를 윗선에서 막았다” 주장

두 사람이 함께 일한 것은 1995년 10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가 서울지검 특수3부로 하달되면서부터였다. 당시 특수3부장이었던 김내정자는 특수2부에 있던 후배 김변호사를 끌어들였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검사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했던 김변호사는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당시 수사에 전력 투구했다. 그 결과 1996년 1월께 김석원 쌍용 회장 집에서 돈이 든 사과상자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십억원을 김회장이 자신의 이태원동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수사팀에 발각된 것이다. 이 수사는 김변호사가 지금도 특수 검사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표시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대박’을 터뜨렸음에도 이는 당시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악연이 시작된 시점이다.
김변호사는 당시 ‘윗선’에서 수사 확대를 막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수사를 하라고 했다가 하지 말라고 했다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몇 가지 못한 게 있다. 사과상자에서 김석원이 관리하던 비자금을 찾은 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계속 수사하겠다고 했다가 검찰 고위 관계자한테 질책을 들었다. 그 일로 ‘말 안 듣는 놈’으로 찍혔다”라고 밝혔다. 당시 김석원 회장은 여당인 신한국당의 대구 달성군 지역구 후보로 출마해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김변호사의 입장에서는 윗선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 검찰’의 태도에 충분히 울분을 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당시 총선에서 대구·경북 지역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김회장을 전략 공천했다. 그런 상황에서 돈 상자가 발견되는 악재가 터진 셈이다. 결국 당시 김회장에 대한 수사는 유야무야되었다. 김회장은 쌍용 회장직을 사퇴하고 그해 4월의 15대 총선에서 무난히 당선했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 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검찰은 궁지에 몰렸다. 김회장을 당선시켜주기 위한 검찰의 명백한 봐주기 수사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에 대해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김내정자는 “김 전 회장을 직접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관련된 실무자들을 조사해 경위를 파악했다. 대가를 전혀 받지 않고 돈을 돌려준 김 전 회장을 금융실명제와 관련해 사법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다”라는 궁색한 해명을 내놓았다. 하지만 다른 기업인들의 사법 처리 사례와 비교해보아도 형평성에 크게 어긋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아무튼 당시 김변호사는 ‘선배’인 김내정자가 좀더 강단 있게 윗선의 압력을 막아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을 두고 못내 서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변호사는 이 사건 수사가 자신의 특수 수사 능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기를 원했던 듯하다. 하지만 김변호사의 이런 바람과는 다른 결과가 이듬해인 1997년 2월 정기 인사에서 나왔다.

“김변호사가 직접 발표했다면 김내정자 언급할 수 있었을까” 분석도

김변호사는 부천지청으로 발령났다. 당시 김변호사는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당시의 인사에 대해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사 때 찍힌 탓에 좌천을 당했다고 믿고 있다. 김내정자가 “통상적으로 서울에서 한 3년 했으면 지방도 한 번 도는 것이다”라고 위로했으나, 김변호사는 옷을 벗겠다고 했다. 반면 김내정자는 특수1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남 출신인 데다 윗선의 눈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처신으로 순조로운 길을 가는 ‘선배’의 영전을 보면서 그는 깊은 자괴감과 울분에 사로잡힌 듯하다. 그의 기준으로 볼 때 김내정자는 결코 ‘정의로운 검사답지 못한’ 모습으로 보였음직하다. 사실 검찰 주변에서도 김내정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김내정자의 프로필이 소개될 때마다 항상 당시의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사 성과가 가장 앞머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김내정자가 스스로 강력한 의지를 갖고 수사에 임한 적이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을 내놓는 의견들도 많다. 실제 1995년 8월 대검 중수과장 시절, 서석재 당시 총무처장관의 ‘전직 대통령 4천억원대 비자금 가차명 계좌 보유 발언’으로 검찰이 수사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 김내정자는 기자들에게 그 유명한 ‘나가레’ 발언을 해서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일본 말로 무효라는 뜻이다. 즉 서장관의 말은 뜬소문에 불과하므로 수사할 필요성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뒤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가 공개되면서 다시 수사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실상 등 떠밀려 수사한 꼴이었다.
김내정자는 지난해 12월 한 인터뷰에서 삼성 비자금을 폭로하고 나선 김변호사의 행동에 대해 묻는 질문에 “윤리적 측면에서 양면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라는 다소 모호한 말을 남겼다. 검찰 출신의 한 관계자는 “만약 사제단이 발표하지 않고 김변호사가 직접 했다면 김내정자의 이름을 차마 거론하지 못 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행간의 의미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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