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줌마 머리에 꽃이 핀다
  • 하재근 (대중문화 비평가) ()
  • 승인 2008.03.1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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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가세, 주부 판타지 전성시대…방송사 안일한 기획은 자제 필요

 
최진실 주연의 TV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이 시작되었다.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뽀글뽀글 퍼머머리에, 지지리 궁상 인생을 살고 있는 아줌마. 아이도 당연히 있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받고 시누이에게 주눅드는, 돈 한 푼에 벌벌 떨며 억척 ‘알바’ 전선에 나서는 아줌마가 최진실의 배역이다.
그런 아줌마 인생에 기적이 찾아온다. 당대 최고의 남자 스타가 최진실의 곁에 나타난 것이다. ‘아니,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인생대박, 인생 역전, 말로만 듣던 인생 로또다. 이제 아줌마 생애의 마지막(정말?) 스캔들이 펼쳐진다.
평범한 남자에게 당대 최고의 여자 스타가 찾아온다는 설정으로는 줄리아 로버츠의 <노팅힐>, 후지와라 노리카와 초난강의 일본 드라마 <스타의 사랑> 등이 유명하다. 둘 다 남성을 위한 궁극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었다. 요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가 유명하지만, 이런 류의 비현실성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사한 사례로는 <환상의 커플>을 꼽을 수 있겠다.
젊은 여자가 재벌과 만난다는 신데렐라 판타지는 흔하다. 그러나 신데렐라든 뭐든 아줌마가 되면 끝이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 ‘아줌마’에게 무슨 희망이 있단 말인가.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서 최진실은 CF 엑스트라 알바에 나선다. 그 광고는 남자 주인공이 아줌마들 틈에서 여자를 찾다가 젊은 여자와 만나는 순간 아줌마들이 다 쓰러진다는 화장품 광고였다. 그 대목에서 최진실은 분통을 터뜨린다.
“여자를 찾다니 그럼 우린 뭐야?”
“뭐긴 뭐야. 여자도 아니라는 거지.”
“쓰러지긴 왜 쓰러져! 기분 나빠서 이런 화장품 사겠어요?”

뽀글 퍼머의 회춘…“나 아직 죽지 않았어”
이 드라마는 말한다. ‘고목에도 꽃이 핀다!’ 극중 최진실은 확실한 고목이 되기 위해 과장된 아줌마 퍼머를 하고, 심지어는 나이 마흔 직전에 폐경을 당한다. 다리를 벌리고 산부인과에서 검진을 받을 때 최진실이 잠을 자는 것은, 이제는 부끄러움도 떨림도 없는 확실한 제3의 성, 고목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설정이었다. 그래야 남자 스타와의 스캔들이 화려한 반전이 된다.
여배우들은 나이를 먹으면 정상의 자리에서 밀려난다. 나이 마흔 직전에 폐경을 당하는 설정은 그런 처지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반면에 남자배우들은 점점 더 나이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에서는 송강호와 김옥빈이 만난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서 황정민과 전지현, <싸움>에서는 설경구와 김태희가 나왔다. 모두 나이 차가 10년이 넘는다. <이산>에서도, <쩐의 전쟁>에서도, <외과의사 봉달희>에서도 주인공 커플이 열 살 차이였다. 최근 문근영의 TV 복귀작 상대역으로 박신양이 거론되고 있다. 고아라의 상대역은 윤계상이다. 모두 열 살 차이 이상이다.
그런데 아무도 나이 차이에 놀라지 않는다. 남자가 훨씬 유리한 세상이 된 것이다. 여성의 청춘은 일찍 끝나는데 남성의 청춘만 홀로 질주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 세상의 결혼은 상식적인 수준의 나이 차이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벌어지는 남성 판타지이다. 그 판타지가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도 드라마 배역 간 나이 차에 주목하지 않는 판타지의 생활화.
이런 ‘판타스틱’한 세상에서 <노팅힐>과 <스타의 사랑>에 열광했던 필자에게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은 통쾌한 반전이었다. 아줌마에게 스타가! 고목에 꽃이! 뽀글 퍼머에 스캔들이! 돈벼락 맞는 것보다 더 화려한 판타지이다. 잃어버린 여성성, 관심, 떨림, 여성으로서 존중받는 것을 회복하는 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을 보며 이런 환청을 들었다.

주중에는 ‘청춘극장’, 주말에는 ‘아줌마 한풀이 쇼’

 

‘나 아직 죽지 않았어!’
이 드라마 하나만 보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얘기가 달라진다. 주말 드라마 시장에 아줌마 판타지 전성기가 펼쳐지고 있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는데 이래도 되나?
주중 미니시리즈의 경우 시청률 20%를 넘기기가 힘든데, 주말 드라마는 20%가 우습다. 대부분 아줌마를 대상으로 한 드라마들이다. 주말 TV 채널 결정권에서의 아줌마 파워가 아줌마 드라마를 만들게 하고, 아줌마 드라마가 아줌마들을 TV 앞으로 불러들인다.
주부 드라마는 대체로 전통적인 가족 드라마나 통속 멜로물, 그리고 이 드라마처럼 아줌마 한풀이의 ‘아줌마 판타지’이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조강지처 클럽>에서는 구박받던 아줌마 역할의 오현경이 화려한 커리어우먼으로 변신했다. 사회적 성공뿐만 아니라 젊고 잘생긴 본부장의 관심까지 받아 고목에 꽃이 피려 한다.
오현경 친구 역할의 김혜선에게도 꽃이 피기는 마찬가지. 김혜선의 기본 의상은 몸빼 바지이다. 의상을 좀 바꿔줘도 좋으련만 촌스러운 옷차림을 고집한다. 아줌마들의 감정 이입을 노리는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천하일색 박정금>에서는 아줌마 박정금 역할의 배종옥이 아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주먹싸움의 주체가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젊은 법조인과 의사의 구애를 받는다. 정말 판타스틱한 판타지이다.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은 이런 판타지의 끝장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남성 스타가 아줌마에게로!
아줌마성이 강할수록 시청률이 오른다. <조강지처 클럽>에서는 주인공인 오현경이 말끝마다 아줌마를 강조한다. 다른 인물들의 대사에서도 아줌마라는 단어가 강조된다.
“내가 얼마나 살지 모르겠지만 남아 있는 동안 행복할 수 있다면 바로 아줌마하고 함께하고 싶다구요.”
“내가 얼마나 궁금했는지 알아요? 아줌마 정신으로 참았죠.”
“빠져도 정신없이 빠졌구만. 꼴랑 생선 장사 아줌마한테.”
노골적이다. 옛날에는 우아하고 세련된 유부녀의 불륜담이 나왔었다면 요즘에는 뽀글퍼머 몸빼바지 아줌마의 가슴 떨리는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조강지처 클럽>에서도,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서도 이혼 얘기는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이 있을 뿐이다.
“나 가정 못 깨.”
“누가 가정 깨래? 그냥 감정 가는대로 놔두라구. 순이 아빤 지 하고 싶은 것 다 했는데 왜 너만 못해?”
<조강지처 클럽>의 대사이다. 남편들은 ‘지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 나라고 왜 못해? 이런 주부의 한을 드라마들이 점점 더 대리만족시켜주고 있다. 리모콘을 틀어쥔 주부들의 힘 때문에 말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드라마 컨셉트는 리모콘에서 나온다? 하지만 결국 리모콘에서 나온 가상의 권력일 뿐 현실과는 상관이 없다.
이대로 가면 주중에는 젊은 여성이 재벌 2세를 만나 성공하고, 주말에는 아줌마가 멋진 청년의 낙점을 받아 인생의 의미를 찾는 구도가 된다. 혹은 주중에는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전문 드라마, 세련된 대작, 주말에는 아줌마 한풀이의 양극화 구도. 아무리 시청률도 좋지만 주말 드라마가 이렇게 아줌마 판타지 일색으로만 가도 괜찮은 것일까? 언제나 과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방송사들의 안일한 아줌마 시청률 소비, 자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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