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품 떠난 공기업은 헤지 펀드 먹잇감”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 승인 2008.03.1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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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난방공사?증권선물거래소?기은캐피탈 등 잇달아 상장 예정…“정부 차원 적대적 인수·합병 대비책 마련” 목소리 높아

 
공 기업 민영화가 가시화되면서 한편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민영화와 함께 우량 공기업이 증시에 상장하게 될 경우 자칫 외국계 헤지펀드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금감원 관계자는 “지역난방공사나, 증권선물거래소, 기은캐피탈 등이 최근 상장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대비책이 소홀할 경우 국가 기간 산업이 통째로 외국에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기은캐피탈, 지역난방공사, 한전KPS 등의 상장을 결정했다. 현재는 시장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상장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해당 3사는 “상장은 적대적 M&A와 무관하다”라고 주장한다. 기은캐피탈 관계자는 “이번 상장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자금을 확보함과 동시에 영업력을 확대해나가는 것이 목표이다. 상장이 되어도 정부나 모기업이 대주주로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게 되기 때문에 M&A 우려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들 3사의 모기업도 민영화가 불가피하다. 모기업들이나 정부의 제어에서 풀려나는 순간 얼마든지 헤지펀드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기업사냥꾼 아이칸 펀드는 지난 2005년 KT&G에 대한 경영권 인수를 시도한 바 있다. 아이칸의 적대적 M&A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우량 공기업도 헤지펀드의 공략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제2, 제3의 ‘아이칸 펀드 사태’ 생길까 우려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민영화된 공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배 구조가 아직까지 취약한 공기업들의 경우 외국계 펀드 입장에서 좋은 공격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를 제치고 시가총액 1위 기업으로 떠올랐던 포스코도 현재 아르셀로-미탈 사로부터 지속적인 적대적 M&A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그동안 주식 교환을 통한 우호 세력을 구축해 나름대로 방어를 하고 있지만 언제라도 분란에 휩싸일 수 있다.
따라서 전경련, 대한상의 등의 재계는 물론 금융권과 한국은행, 금융감독원과 같은 기관에서도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제2, 제3의 ‘아이칸 펀드 사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윤성훈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과장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M&A에 대한 방어 수단이 많이 취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과 같이 최소한 기간 산업이라도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장병완 전 기획예산처장관도 지난 3월14일 서면 인터뷰를 통해 “국민에게 주식을 분산시키는 방법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단 한 주만 가지고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금주 제도’는 현재 선진국에서 널리 이용하는 경영권 보호 방법이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정부 차원에서 공기업에 대한 적대적 M&A 대책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획재정부(옛 재정경제부)는 그동안 “M&A 방어 장치 도입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고, 주주 평등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라며 대책 마련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왔다. 이로 인해 금융감독원이나 한국은행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국내 기업에 대한 외국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 우려가 가시화되면서 정부도 방어 장치 마련에 나섰다. 법무부는 지난 3월3일 이명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외국인의 M&A를 까다롭게 하는 상법 개정안을 보고했다.
상법 개정안에 담긴 경영권 방어 장치로는 차등 의결권과 독약(포이즌 필) 조항을 들 수 있다. 차등 의결권은 기존 경영진에 우호적인 주주에게 의결권이 2~100개인 주식을 발행하는 제도이다. 현재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에서 활용하고 있다.
포이즌 필은 적대적 M&A가 시도될 때 이사회 결정으로 기존 주주에게 헐값으로 신주를 발행하는 제도이다. 모자란 의결권만큼 신주를 새로 발행할 수 있기 때문에 경영권 방어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국가 기간 산업 보호” “외국인 투자 위축” 논란

국회 차원에서도 현재 관련법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지난해 3월 한나라당 이병석 의원이 관련 개정안을 발의한 이래 7개 법안이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이다. 여야가 최근 대치 국면에 접어들면서 적대적 M&A 방지를 골자로 하는 상법 개정안 통과가 미루어지기는 했지만 국회가 정상화되면 통과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병석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통과가 잠시 연기된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상당수 의원이 이 법안에 공감하고 있는 만큼 하반기에 개정안이 통과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고 보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기획재정부도 최근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불장군’ 식으로 반대 입장을 밀어붙일 수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같은 분위기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우량 공기업을 도우려다 자칫하면 ‘불량’ 기업까지 감싸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영관 대외경제정책연구원 WTO 팀장은 “국가 주요 산업에 대한 외국인의 적대적 M&A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이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자칫하면 외국인 투자 유치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는 산업은 대부분 정부 독점 사업이다. 또 경영권을 바꾸고 싶어도 정부의 인·허가 대상인 경우가 많아 외국인 M&A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내 기간산업 보호를 위한 방어 장치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나친 경영권 보호 움직임은 오히려 ‘약’보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송팀장의 지적이다.
그는 “외국인투자촉진법에도 외국인 투자가 국가 안보 유지 등에 지장을 초래할 경우 부계부처 장관이 시정 명령을 내리거나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국가 안보 등을 이유로 기업 경영권 보호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차등 의결권 제도가 적대적 M&A를 막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자칫하면 무능한 경영진의 임기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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