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속 거닐다 ‘파티는 끝났다’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03.2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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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 위기, 원흉은 저금리 정책 편 앨런 그린스펀…“서브프라임 시체 어디에 묻나”

 
경제는 순조롭고 인플레이션 위험은 보이지 않았다. 경기 침체도 올 것 같지 않았다. 세계 각국에서 우려하는 금융 위기는 먼 나라 이야기로 들렸다. 바로 지난해 여름 미국 경제의 모습이었다. 2004년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이사였던 벤 버냉키는 미국 학계 보고서의 한 구절을 빌려 비교적 평온했던 미국의 경제 상황을 ‘위대한 절제(great moderation)’라고 명명했다. 미국 5위의 투자은행 베어스턴스가 JP모건에 팔리던 지난 3월16일 버냉키가 말한 절제는 결코 위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과잉 대출과 과잉 소비가 초래한 무절제의 유산이었다. 2백억 달러짜리 은행이 2억3천만 달러에 팔렸다. 이것이 끝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지 모른다. “파티는 끝났다”라는 탄식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이제 아무리 몸부림쳐도 미국 경제의 붕괴를 막을 수 없다는 극단적인 비관론까지 나온다.
미국의 금융 위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면 지난 30년간 미국경제의 성장이 신기루였다는 사실이다. 미국 은행들은 무모하게 돈을 빌려주었고 소비자들은 겁 없이 돈을 썼다. 지난해 후반까지도 ‘누구나(anybody)’ 은행에 가면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저축률은 거의 제로였고 투자는 주로 외국 자본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국 경제에 무절제의 병을 만든 사람은 2006년 FRB 의장에서 사임한 앨런 그린스펀이다. 그는 줄곧 저금리 정책을 폈다. 저금리만이 경제를 순환시키는 비책으로 생각한 것이다. 2001년 FRB 이사였던 에드워드 그램리치는 과열되고 있는 부실 담보 대출을 규제하라고 건의했다가 그린스펀의 핀잔을 들었다. 7년 전 서브프라임의 악몽을 예견한 그는 지난해 9월 사망했다. 지금쯤 지하에서 통곡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린스펀을 승계한 버냉키도 위기의 그림자를 감지하지 못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나친 저금리의 위험을 경고해도 듣지 않았다. 덕분에 미국 경제가 성장하고 소비가 촉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성장이 거대한 버블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버블은 처음에는 증권에, 다음에는 부동산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신용 붕괴가 왔다. 처음 집을 사는 사람에서부터 월스트리트의 중역에 이르기까지 버블의 단맛에 취했다. 지난 16년간 미국 소비자들은 이전 16년보다 거의 두 배를 지출했다.
이제 대가를 치르고 있다. 경제에 큰 문제가 없다고 우기던 부시 미국 대통령도 지난 3월17일 긴급 소집한 경제대책회의에서 ‘도전의 시대’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미국 경제가 이번에 침체에 들어가면 그 심도는 깊고 기간은 길어지리라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판단이다. 미국의 23개 주가 지난 달 경제 침체 리스트에 편입되었고 7개 주가 곧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주가·부동산 가격 추가 하락 여지 많아 문제
문제는 침체가 얼마나 심각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1990~1991년과 2001년에 침체 국면이 있었으나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 라구람 라잔 씨는 끔찍한 말을 했다. “불확실성 중의 하나는 서브프라임 시체를 어디에 묻는가 하는 것”이라고 했다. 8천억 달러 내지 1조 달러로 추산되는 손실을 누가, 어떻게 떠안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1990년대 후반 파산 위기에 몰린 투자회사 LTCM의 경우보다 더 암담하다. 당장의 문제는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너무 높아 아직 추가 하락의 여지가 많다는 점이다. 메릴린치의 이코노미스트 데이비드 로젠버그 씨는 주가가 금리에 비해 10% 과대평가되었다고 말했다. 주택 사정은 더 나쁘다. 2000년까지 주택 가격과 대출 이자의 균형은 적절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유지되어온 이 등식은 완전히 무너졌다. 집값이 30%는 더 떨어져야 균형이 맞는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학 경제학 교수는 집값의 추가 하락으로 발생할 손실액을 6조 달러 내지 7조 달러로 추산했다.
참으로 답답한 국면이다. 주가와 달러는 하락하고 서브프라임은 패닉 상태를 몰고왔다. 이라크 전비가 3조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 역시 상황을 더 어둡게 한다.
작금의 사태는 정치인과 언론이 미국의 실상을 장밋빛으로 포장한 데 일말의 책임이 있다. 대출금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부자들이나 읊조리는 이상향을 꿈꾸며 무작정 돈을 빌린 것도 잘못이다. 미국 인구 3억명 중 3천7백만명은 가난하다. 4인 가족 기준으로 연 소득 2만 달러 내지 4만 달러로 살아간다. 정치인들은 이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심어주었다. 수없이 깨어진 이 꿈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또 한 번 무너졌다. 미국인들은 올림픽의 다이빙 선수처럼 부채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국제고용연대의 앤드루 스템 씨는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잘살 수 있다는 희망, 특히 후손들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송두리째 사라졌다고 말했다. 사실 꿈이란 위험한 것이다. 정치인들은 미래보다는 목전의 집단 이익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지금 빚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 대부분은 육지로 생환할 희망도 없다.
빌 브래들리 전 상원의원은 자신의 저서 <뉴 아메리칸 스토리>에서 공공 부문과 민간의 채무상태는 “불길한 수준”이라고 썼다. 미국인들은 솔직히 말해 자신의 미래를 속였다. 경제 성장은 인간과 사회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로 보장된다. 이런 투자는 하지 않고 모기지 회사들은 사술까지 써가며 대출을 부추겼고 소비자들은 한도가 넘도록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광기를 부렸다.
미국 경제의 위기는 미국만의 위기가 아니다. 세계의 증시가 요동을 치고 달러 가치는 추락하고 있다. 중국 경제가 공백을 메워줄 것이라는 전망이 있기는 하나 가망 없는 일이다. 미국은 세계 GDP의 28%를 차지한다. 중국은 5%에 불과하다. 아시아의 생산고를 다 합쳐도 24%이다. 유럽 수출의 23%는 미국으로 간다.
현재의 위기가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위안거리는 이 위기가 1929년 대공황과는 그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그때처럼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대공황은 생산과 소비의 붕괴 그리고 중앙은행의 자금 지원 실패로 일어났다. 유동성 부족이 제일 큰 원인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만든 주범은 유동성 과잉이다. 서브프라임 위기는 유동성 과잉이 유동성 고갈을 빚은 역설적 비극이다. 따라서 넘치는 유동성을 잘 조절하면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그린스펀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
문제는 금리 인하 수단밖에 없는 FRB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다. 거의 모든 은행들이 자금 고갈에 직면했다. 이 갈증을 풀어줄 구세주는 외국 자본이다. 뉴욕 타임스는 두바이, 중국, 쿠웨이트, 한국이 구제 금융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나라들이 미국 금융 시장에 얼마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지는 비밀에 쌓여 있다. 부시와 버낸키는 외국 자본을 활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단기 처방일 뿐이다. 바람직한 처방은 미국 납세자들로부터 구제 금융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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