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몇 명을 죽였나 꼬리 무는 의문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 승인 2008.03.24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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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초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의 범인이 잡혔다. 범인은 살해된 이혜진양의 집에서 불과 1백30m 떨어진 곳에 살았다. 지하 월셋방에서 독신으로 살며 밤에는 대리 운전으로 돈벌이를 해오던 정 아무개씨(39)였다. 이웃집 아저씨가 잔혹한 살인범인 것으로 밝혀지자 경찰도 놀라고 숨진 초등학생들의 가족들도 놀랐다. 이를 지켜보던 국민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정씨의 검거가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2, 제3의 의혹들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동안 경기도 서남부 지역에서 발생한 6건의 여성 실종 사건이 정씨에게 정조준되었다. 과연 정씨의 범죄는 어디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 것일까. <시사저널>은 정씨와 실종 여성들과의 연관성을 추적해보았다.
지난 2005년 12월3일 전화방 도우미 ㅇ씨(53)는 정씨의 집을 찾았다가 봉변을 당했다. 정씨는 ㅇ씨의 양손을 묶고 얼굴 등을 폭행한 뒤 성폭행했다. 다행히 정씨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도망쳐서 추가 범행을 모면할 수 있었다. 경찰은 당시 정씨를 불러 조사했으나 ㅇ씨가 협조하지 않아 사건을 종결했다. 정씨는 그 뒤에도 각종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경찰의 용의 선상에 올랐으나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전화·노래방 도우미’ ‘사체 유기’ 등 공통점
경기도 서남부 지역에서 발생한 6건의 실종 사건은 개별적으로 보면 각기 다른 사건이다. 하지만 정씨와 연결해서 보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있다. ‘사건의 정황’ ‘위치’ ‘동선’ ‘전화·노래방 도우미’ ‘여성’ ‘사체 유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들 사건을 연결하는 끈은 용의자 정씨이지만 줄기의 밑둥은 정씨에게 성폭행당한 ㅇ씨다.
2004년 7월17일 군포에 있는 한 전화방에서 도우미 ㅈ씨(당시 44세)가 실종되었다. 도우미 ㅈ씨가 일한 전화방은 공교롭게도 ㅇ씨가 일한 전화방과 같은 금정역 먹자골목에 있었다. 도우미 ㅈ씨는 당일 밤 11시40분쯤 용의자 정씨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뒤 실종되었다.
경찰은 정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긴급 체포했다.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는 거짓이라는 반응까지 나왔다. 정씨가 몰던 에스페로 승용차에서는 야삽 2개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정씨의 범행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실종된 당일의 통화 내역과 대리 운전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조회했으나, 서로 다른 장소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야삽에서는 혈흔이나 흙 묻은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정씨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본격적인 재수사에 착수했다.
2006년 12월13일 밤 10시30분쯤에는 노래방 도우미 ㅂ씨(45)가 실종되었다. ㅂ씨가 일한 노래방도 ㅇ씨와 ㅈ씨가 일했던 금정역 먹자골목에 있었다. 2년 사이에 한 골목에 있는 전화방과 노래방에서 3명이 성폭행당하거나 실종된 것이다. 우연으로 보기에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우연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실종자들의 활동 영역이 금정역 먹자골목이며 이곳에서 일하던 ㅇ씨를 용의자 정씨가 성폭행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세 건의 사건이 ㅇ씨와 연관되었다면, 다음 세 건은 숨진 이혜진·우예슬 양과 연관되어 있다. 2006년 12월24일 노래방 종업원 ㅂ씨(36)가 수원시 화성시장 노래방 인근에서 실종되었다. ㅂ씨는 실종된 지 5개 월 뒤인 지난해 5월 안산시 사사동 야산에서 암매장된 채 발견되었다. 시신 발견 장소는 혜진양이 발견된 지점으로부터 불과 4km 떨어진 곳이다.

 

정씨 집에서 발견된 남자의 체액은?
지난해 1월7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기업은행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 회사 경리사원 ㅂ씨(52)가 실종되었는데, ㅂ씨가 실종된 화성시 남양동은 혜진양의 시신이 발견된 수원과 지근거리에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대생 ㅇ씨(20)가 실종된 수원 권선구 금곡동 버스정류장도 혜진양의 시신이 발견된 호매실 나들목과 직선 거리로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지난 3월21일에는 예슬·혜진 양이 유괴되었던 안양에서 또 다른 여성이 실종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안양경찰서에 따르면 지난해 1월6일 오전 6시10분쯤 안양시 관양동의 한 노래방에서 중국인 교포인 도우미 ㄱ씨(37·여)가 한 남자 손님과 밖으로 나간 뒤 행방불명되었다. 김씨는 이날 손님과 함께 해장국을 먹으러 나갔으며 같은 달 11일까지 연락이 되지 않자 보도방 업주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이들 피해자 가족들에게는 몸값을 요구하거나 협박 전화가 없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또 피해자가 모두 여성인 데다 시신이 암매장되었다. 정씨의 범행 수법과 너무 흡사하다. 이런 점들이 정씨와의 관련성에 더욱 무게를 실어주는 정황들이다. 용의자 정씨와 관련한 의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씨 집에서 발견된 톱 2개에서도 새로운 의문점이 나타났다. 이번에 시신으로 발견된 우예슬양의 피부 조직과 정씨의 체액이 발견된 톱에서 이들과 다른 남성의 체액이 검출된 것이다. 경기경찰청 수사본부도 “정씨 집 화장실 벽에서 두 어린이와 정씨의 혈흔이 아닌 남자 혈흔이 발견되었고,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톱 한 개에서도 또 다른 남자의 체액이 발견되었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정씨 집 화장실과 범행 도구에서 발견된 각기 다른 남자 두 명의 체액과 혈흔은 누구의 것일까. 우선 세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정씨와 공범 관계였다가 희생되었거나 제3의 피해자인 경우다. 또 이번 사건과 전혀 무관할 수도 있다. 정씨의 집에서 나온 마취제 이름이 쓰여진 쪽지가 이번 범행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주목되고 있다. 정씨 집에서 발견된 쪽지에는 마취제 이름과 함께 다른 약품과 혼합하는 방법까지 쓰여 있었다.

 

경찰, 범행 동기·여죄 알아내기 위해 본격 심리전 돌입
경찰은 정씨의 범행 행태로 미루어 공범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정씨가 지하 셋방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한 채 혼자 살아왔고, 공범이 있을 정황이 드러나지 않은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경찰은 정씨가 범행 직후 통화한 대학 선배 ㅇ씨를 불러다 공범 여부를 집중 조사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ㅇ씨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가장 가까운 시간에 용의자 정씨를 만났고 범행 직후 통화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정씨가 범행에 사용한 렌터카를 빌린 시각(오후 9시50분)과 ㅇ씨와 통화한 시각이 10분밖에 차이 나지 않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경찰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는 또 있다. 시신 훼손 장소와 방법 등이 명확하지 않다. 정씨는 자신의 집에서 살해했다고 진술했지만 시신 처리 과정에도 의문점이 많다. 왜 혜진양과 예슬양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는지도 밝혀야 한다.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유괴했고 어떻게 토막 내서 암매장하거나 하천에 버렸는지도 풀어야 할 과제다. 그러나 경찰이 실종 사건들과 정씨와의 연관성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씨의 범행으로 단정 지을 만한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씨 자신도 여죄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결국 물증을 찾지 못하면 의혹만 잔뜩 부풀린 채 흐지부지 끝날 가능성이 크다. 정씨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정씨는 경찰에 체포된 이후 의도적으로 진술을 번복해왔다. 혜진·예슬양의 살해 동기도 시간이 지날수록 오락가락했다. 범행을 일부 시인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인한 과실 치사’를 주장했다. 그러다가 ‘음주 사고 후 살인’을 했다고 다시 말을 바꾸었다. 안양경찰서 김병록 형사과장은 “정씨가 ‘지난해 12월25일 오후 6시쯤 담배를 사러 가다가 마주친 두 어린이의 어깨를 손으로 만지자 소리치며 반항하기에 부모에게 알리면 범죄자로 몰릴까봐 코와 입을 막고 벽으로 밀어붙여 우발적으로 숨지게 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라고 전했다. 정씨의 이런 태도는 진술을 수시로 번복하면서 진술의 증거 능력을 스스로 훼손하려는 의도로 파악되고 있다. 정씨가 이같은 행태를 계속 반복하는 상황에서 자백에 의해 추가 범행을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정씨의 범행 동기와 여죄 파악을 위해 본격적인 심리전에 착수했다. 경찰청과 경기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범죄행동분석팀 프로파일러 5명을 수사본부에 긴급 투입해 정씨와 면담한 결과를 토대로 심리 분석에 들어갔다.폭력 조직 ‘지존파’를 검거했던 고병천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은 “어린이 대상 범죄는 반인륜적인 범죄다. 해마다 어린이 실종사건이 증가하는 것은 어른들의 탐욕에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희생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경찰이 범인을 심문하고 있으니 곧 모든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네티즌들은 용의자 정씨의 범행을 ‘제2의 유영철 사건’으로 비화시키고 있다. 21명을 살해한 유영철과 정씨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성폭행, 토막 살해, 사체 유기 등이다.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힘없는 여성들을 노렸다는 점도 유영철 연쇄 살인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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