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비고 ‘이’ 빠지면 ‘정’이라도 새로 들까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 승인 2008.04.0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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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총선 후 리더십 공백 우려… 집단 지도체제 택할 가능성 커

 

온통 박근혜 얘기뿐이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4월1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마음을 움직여주면 고맙겠다”라고 말했다. 권기균·유정현 후보 등 서울·경기 지역에 출마한 한나라당 후보 다섯 명은 당사에 나와 “친박연대 후보들이 마치 자신들이 한나라당 후보인 것처럼 유권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한나라당 후보들을 위해 지원 유세에 나서달라”라고 호소했다. 지역구인 대구 달성에 내려가 ‘시위’ 중인 박 전 대표가 움직일 때마다 곁에는 친박연대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인사들이 따라 붙기 경쟁을 벌인다.

이들의 호소가 있은 다음날인 4월2일 박 전 대표는 ‘영상 메시지’로 답했다. 이른바 ‘친 박근혜 후보’ 11명에게 격려의 말을 담은 영상 녹화물을 보낸 것이다. 11명은 모두 한나라당 후보들이었으나 박 전 대표의 행위는 이들 뿐만 아니라 당을 떠나 친박연대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친 박근혜 후보’들을 지원해달라는 강력한 암시로 받아들여졌다. 실제 대구를 중심으로 영남 지역에는 ‘친박’ 열풍이 몰아쳤다. 이런 ‘박풍(朴風)’을 제어할 마땅한 수단이 한나라당에는 없다.

박 전 대표, 당권 도전 안 할 듯

이정현 공보특보에 따르면 박 전 대표는 요즘 말로 뿔이 났다. “정치 개혁이 후퇴하는 것에 분노했다. 계파에 속한 인사들 몇 명이 당선하는지 여부에 연연하지 않고 중심을 지키며 의연하게 간다”라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흐름은 분명 7월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권을 잡는 쪽이었지만 최근 분위기가 변했다. 총선 이후 전개될 정치 상황에 여러 가지 가변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혼란기에 나서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라는 의견과 “이런 불투명한 가운데 나설 필요가 있느냐”라는 의견이 내부적으로 갈리는 모양새다.

박 전 대표측의 이런 고민은 박 전 대표가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하게 되면 ‘박근혜- 비박근혜’ 구도가 형성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총선을 거치며 형성된 당내의 기본 구도 자체가 ‘친 이명박’인 데다가 대권을 꿈꾸는 입장에서 진작부터 심한 갈등 전선을 형성하면 유리할 것이 별로 없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측근은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자리가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박 전 대표는 7월 경선에 출마하지 않는 대신 호흡을 가다듬고 당내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길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정치학)는 “실용 노선을 취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려움에 처하면 박 전 대표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지금 당권에 도전할 이유가 없다”라고 분석했다.

 

물론 ‘칩거’하며 응원하는 길을 택한 박 전 대표의 선택이 박수만 받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박근혜 마케팅’을 펼치며 총선 국면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일부 인사들의 경우 ‘한물간 인물들’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들이 ‘박근혜 우산’을 쳐들면서 박 전 대표 또한 이들과 한 묶음으로 치부되곤 한다. “박 전 대표가 울타리에 갇혀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 영남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은 계속 유지하겠지만 대권은 힘들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박 전 대표가 어떤 선택을 하든 총선 이후 여권의 권력 구도는 재편이 불가피하다. 강경파와 온건파를 상징하는 여권 권력의 두 축이었던 이재오 의원과 이상득 국회부의장은 어느 정도 발이 묶였다.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에게 덜미를 잡혀 고전하는 이의원은 총선 고지를 넘는다고 해도 전과 같은 영향력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이상득 부의장 공천 반납’ 거사에 행동을 함께 했던 소장파들이 중간에 태도를 바꾼 그를 한목소리로 비난하며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부의장 또한 소장파들의 ‘공천 반납’ 요구와 ‘형님 정치’로 상징되는 좋지 않은 여론 때문에 언론에 주목되면서 활동에 제약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남경필·원희룡 등 소장파 운신 폭 넓어져

이러한 여권 내 ‘주류의 진공 상태’는 취약한 지도 체제가 출범할 가능성을 점치게 한다. 누구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집단 지도 체제로 당을 운영하는 방안이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 주류는 분화하고 비주류는 결집하는 현상이 이런 구도를 만들고 있다. 정몽준 의원이 당선한다면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으나 그 또한 한나라당에 뿌리가 없다. 지난 공천 과정에서 ‘정몽준 사람’을 단 한 사람도 심지 못했다. 세력 간 타협의 결과로 그가 대표가 된다고 해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강재섭 대표 또한 총선 국면에서 대표직을 버리는 인상적인 ‘희생’을 보여주었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는 데는 실패했다. 정치적인 역량의 한계를 드러냈다.

오히려 주목되는 것은 소장파들이다. 남경필·원희룡·정병국 의원으로 상징되는 ‘미래연대 그룹’과 정두언·진수희·차명진 의원으로 상징되는 ‘친이 그룹’ 소장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경쟁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은 7월 전당대회 때 최고위원 도전 여부는 물론 향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도 경쟁과 협력을 반복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가운데 익명을 요구한 한 의원은 “총선 이후 권력의 힘이 청와대에서 국회로 넘어오게 될 것이다. 각종 문제를 일으킨 대통령 측근 인사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전면화할 것이다. 나도 할 말을 하겠다”라고 말했다. 특히 남경필·원희룡·정두언 의원 등은 정치적 야망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총선 이후 국면에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대통령은 총선 이후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온 프로젝트를 현실화하는 일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가장 주목되는 것이 대운하 사업이다. 그러나 여권 내부에서도 논란이 분분하고 박근혜 전 대표가 “반대한다”라고 분명하게 밝힌 사업이기 때문에 이대통령이 어떤 수순을 밟을지 주목된다. 대운하 사업을 실무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장석효 전 서울시 행정부시장은 4월2일 <시사저널>과의 전화에서 “총선 이후 운하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겠지만, 추진 방법과 과정, 일정 등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위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의 한 관계자는 “박근혜 전 대표가 정말로 각을 세운다면 대체할 정치 세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여권 주변에서는 총선 이후 이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적절한 ‘타협’을 하지 않겠냐는 희망 섞인 관측도 나온다. 이대통령이 말하는 ‘실용’이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로 볼 수 있는 변화무쌍함이 있다는 것이다.

홍준표 의원은 “총선 이후 이대통령은 박희태 의원 등 중량감 있는 인사를 정치 특보로 임명해 정무 기능을 강화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정무 기능이 약한 것이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고 보고 여권 내 주요 인사들과의 관계나 대야 관계를 풀기 위해 청와대 기능을 보완하는 작업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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