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내린 직장’은 비리도 수준급?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 승인 2008.04.0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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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법 동원해 인건비 올리고 법인카드로 유흥비 ‘흥청망청’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이 수술대에 오를 전망이다. ‘신이 내린 직장’으로 불리며 선망과 질시를 동시에 받아온 공기업이 구조 조정과 민영화의 거센 폭풍을 맞게 되었다. 공기업을 파헤치는 감사원의 칼끝이 예사롭지 않다. 총 감사 요원의 절반가량이나 되는 3백40명을 투입해 31개 공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펼치고 있다. 감사원은 4월 중순에 이번 감사를 마무리하고 5월부터 다른 공기업으로 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하반기에는 지방 공기업에 대한 감사도 실시할 계획이다.

감사가 진행되는 도중 이례적으로 10여 건의 적발 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다. 국민에게 실상을 정확히 알리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해당 공기업에게는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번 감사의 최종 목표가 공무원 기강 확립 차원을 넘어 공기업 구조 조정에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감사원은 “공공기관의 경영 전반을 점검해 방만 경영을 개선하고 구조 조정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번 감사를 실시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감사원이 발표한 공기업의 ‘방만 경영’ 실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인건비 편법 인상을 비롯해 인력 채용 비리,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 등 사안도 다양했다.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한국도로공사는 총 2백52개 영업소 중 1백85개소의 통행료 수납 업무를 외주 용역하면서 2007년의 경우 10개 영업소만 공개 경쟁 입찰을 하고 나머지 1백75개 영업소는 정년이 되기 전에 퇴직하는 15년 이상 장기 근속자에게 수의 계약으로 운영권을 나누어주었다. 외주 용역을 인사 적체 해소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로 인해 76억원의 외주 용역비가 과다 지급된 것으로 감사원은 파악했다.

사내근로복지기금 출연에서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손익계산서를 유료 도로 운영과 관련한 도로 사업 부문과 휴게소 운영 등 부대 사업 부문으로 구분해 작성하면서 2006년과 2007년 부대 사업 부문 순이익을 6백46억원 많게끔 계산해 올렸다. 이에 따라 매년 부대 사업 부문 순이익의 5% 상당을 출연하도록 되어 있는 사내근로복지기금에 31억여 원을 과다하게 출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도로공사는 또 자회사인 한국건설관리공사의 외연을 부당하게 확장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증권예탁결제원은 업무추진비를 무분별하게 집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업무 대부분이 독점 사업이어서 특별한 영업 활동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2005년부터 3년간 업무추진비 등 섭외성 경비를 법인세법상 손금산입 한도의 1천%를 초과 집행했다. 이 기간 임원들은 법인카드로 유흥주점, 나이트클럽 비용 등 유흥성 경비를 집행하거나 골프 접대, 상품권 구매, 보석 구입 등으로 총 8억4천8백만원을 사용했다. 또 청사 내에서 개최가 가능한 이사회를 이벤트기획사에 용역을 맡겨 제주도 소재 골프장, 용평리조트 등에서 개최해 최근 3년간 행사비로 9천7백만원을 집행하기도 했다.

채용 비리도 적발되었다. 2007년 하반기 신규 직원을 채용하면서 임원 면접 후 면접 점수표 23곳을 조작해 합격 가능 순위 내에 포함되어 있었던 5명을 탈락시키고 대신 순위 밖의 5명을 합격 처리한 것으로 밝혀졌다. 앞서 최종 선발 전 단계인 필기시험과 실무진 면접 과정에서도 당초 점수를 수정하거나 가필하는 등의 방법으로 성적을 조작했다. 채용과 관련한 비리는 다른 공기업에서도 드러났다. 한국조폐공사는 2005년과 2007년 신규 사원 채용에서 인사팀장 등의 청탁을 받아 자격증 점수 등을 조작해 합격권 순위 밖의 응시자를 합격 처리했고, 대한석탄공사도 2007년 기능 인력 정규직을 채용하면서 인사담당 간부 등이 지인들로부터 청탁받은 사람을 합격시키기 위해 응시원서를 선별적으로 접수받고 경력증명서를 위조하는 방법으로 경력 기준 미달자 10명을 채용했다.

감사원 대대적 감사에 노조는 “표적 감사” 반발

인건비 편법 인상도 여러 건 적발되었다. 한국마사회는 ‘시간외 근무수당’을 기본급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인건비를 인상시켰다. 감사원은 2002년부터 2008년 2월까지 지급된 ‘시간외 근무수당’을 총 2백34억원으로 추정했다. 중소기업은행은 과장급 이하 직원에게 매월 8시간 한도로 시간외 근무수당을 지급하고, 이와 별개로 2005년 100억원, 2006년 59억원, 2007년 2백억원을 전직원에게 일시불로 나누어주었다. 한국수출보험공사는 2005년 12월 사기 진작 명목으로 3백50명 전직원에게 일률적으로 42.7시간의 시간외 근무수당을 적용해 총 2억9천6백만원을 지급했다. 이밖에 한국토지공사와 한국석유공사도 사내근로복지기금을 활용하거나 직위를 올리는 편법을 동원해 사실상 인건비를 올려 지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원이 비위 사례를 구체적으로 발표하자 해당 공기업은 해명에 나서거나 자체적으로 경영 합리화 방안을 내놓는 등 분주한 모습이다. 한국도로공사는 부대 사업 부문 순이익을 6백46억원 많도록 계산해 올려 사내근로복지기금을 과다하게 출연했다는 지적에 대해 “광통신케이블 임대료 2백15억원을 부대 수익으로, 투자주식감액손실 및 법인세 4백31억원을 도로 사업 손실로 계상한 것이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업은 대부분 부대 사업 부문으로 별도 회계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라고 해명했다. 자회사인 한국건설관리공사에 대해서도 “1999년 통합 이후 2002년부터 적자를 지속하다가 2006년부터 흑자 전환이 되었다. 3년간 경영 정상화 후 2011년에 민영화를 추진할 계획이다”라고 설명했다.

증권예탁결제원은 감사원 발표가 있은 다음날인 4월1일 증권회사 수수료 20% 인하 및 감면, 조직 축소와 정원 조정, 골프·스포츠 회원권 처분, 홍보성·행사성 예산 절감, 사회공헌기금 확대, 부패신고센터 운영 등을 골자로 한 경영 합리화 방안을 내놓았다. 증권예탁결제원은 경영 관리상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경영관리개선 TF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노조측은 감사원의 고강도 감사 배경에 의혹을 제기하며 반발에 나섰다. 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은 공기업 수장을 겨냥한 ‘표적 감사’이며 공기업 구조 조정을 위한 ‘명분 쌓기’라는 주장이다. 민주노총에 이어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고 한나라당과 정책 연대를 체결했던 한국노총도 공공부문 구조 조정 반대에 가세해 노·정 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한국노총은 지난 4월2일 공공연맹, 금융산업노조, 전력노조, 체신노조 등 공공부문 10개 회원 조합이 참여한 대책 기구를 출범시켰다.

이러한 노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기업 구조 조정 및 민영화 흐름은 되돌리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일부 공기업 내에서는 ‘올 것이 왔다’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서 “구조 조정과 경영 혁신을 선행하고 민간과 경쟁 관계에 있거나 설립 목적을 상실한 공기업부터 단계적으로 민영화하겠다”라며 ‘공기업 개혁’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기획 재정부는 민영화 대상 기관으로 88곳을 선정해 중점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오는 6월 말까지 구체적인 추진 방향과 일정을 담은 보고서를 마련할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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