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깨는 ‘전국구’ 망령 돈 놓고 금배지 먹기?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 승인 2008.04.2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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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 ‘공천 헌금’ 논란 확산…특별당비, 수백에서 수억까지

‘30당(當) 20락(落)’. 총선철이 되면 으레 정치권 주변에 떠도는 말이다. 30억원을 내면 붙고 20억원을 내면 떨어진다는 뜻으로, 비례대표 당선을 위한 이른바 ‘공천 헌금’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비례대표의 전신인 전국구가 돈 전(錢)자의 ‘전국구’라고 불린 것도 ‘금배지’를 다는 대가로 거액의 돈이 오가는 정치권에 대한 냉소가 담겨 있다.
4·9 총선이 막을 내리자마자 비례대표의 특별당비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공천 헌금’ 의혹이 제기되는 몇몇 당선인들에 대한 검찰 수사가 강도 높게 진행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정치권에서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는 반응과 함께 불똥이 어디로 튈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과거에 비해 정당 운영이 투명해졌다고 하지만 비례대표 공천을 둘러싼 잡음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주요 정당의 앞 순번 후보는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국회에 무혈입성할 수 있다. 정당에서 후보 순번까지 결정하고 있어 당의 선택을 받으면 사실상 당선증을 손에 쥐게 되는 셈이다.
그런 만큼 후보 명단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다. 각 정당은 비례대표로서의 상징성, 인물의 비중, 정당 기여도 등 저마다 공천 기준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공천권을 쥔 특정 인사들과의 친분과 함께 선거자금을 충당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느냐가 공천을 판가름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비례대표 공천을 앞두고 ‘A당은 얼마, B당은 얼마’ 식으로 후보로 낙점받을 수 있는 최소 비용이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후보가 불쑥 튀어나오면 먼저 ‘공천 헌금’ 의혹부터 받게 된다. 최근 논란의 주인공이 된 친박연대 비례대표 1번 양정례 당선인이 대표적이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이름도 생소한 인물이 8명의 비례대표가 당선된 정당의 첫 번째 후보라는 점이 쉽게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당 비례대표 당선인도 “누군지 몰라서 궁금했다”라며 의아해하고, 공천심사위원장조차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뒷말’이 무성할 수밖에 없다.

“과거 비례대표 1번은 30억~50억원 내야 공천”

공천을 사실상 주도한 서청원 대표가 직접 기자회견을 갖고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라고 해명했지만 부풀대로 부푼 의혹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양당선인이 특별당비를 냈다고 밝혔는데도 건네진 돈의 액수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자 알려진 1억100만원보다 훨씬 더 큰 금액이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 정치권 인사는 “과거 비례대표 1번이면 30억원에서 50억원은 내야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 일종의 관행처럼 자리를 잡았다. 정치 상황이 달라져 금액이 작아졌을 수는 있겠지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인물이 1억원 정도로 첫 순번을 차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천 헌금’ 의혹은 자연스럽게 학력 및 경력 부풀리기 의혹으로 옮아갔다. 친박연대는 당초 양당선인을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의 여성회장으로 소개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당의 실무자가 잘못 기재했다”라는 해명이 있었지만 친박연대의 정치적 성향을 고려할 때 고의성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창조한국당 비례대표 2번 이한정 당선인도 경력이 도마에 올랐다. 학력이 모호한 데다 3건의 사기 및 공갈 전과까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당선인은 광주제일고를 다닌 것으로 이력서에 기재했지만 확인 결과 이 학교에 입학이나 재학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수원대 석사 학력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난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이미 학력·범죄 경력을 속였다가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당선인도 특별당비로 수천만 원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창조한국당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문국현 대표는 “공천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당선인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총선을 치르고 나서야 알았다”라고 말했다. 청문회를 통해 의혹을 확인한 창조한국당은 이당선인에게 자진 사퇴를 권고했지만 이당선인은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비례대표 경우 사퇴하면 다음 순위자가 의원직을 물려받고, 사퇴를 거부해 제명당하면 무소속으로 의원직이 유지된다.
민주당의 경우 비례대표 6번인 정국교 당선인이 주가 조작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정당선인은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차명 계좌로 자사주를 사들여 부당 이득을 얻은 혐의 등으로 금감원으로부터 고발되었다. 민주당은 이에 대해 “금융감독원에서 석 달 가까이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밝혀졌다”라고 해명했다. 정당선인도 특별당비로 1억원을 냈다. 당에 10억원을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은 경위도 구설에 올랐다.

 

대가성 입증돼야 처벌…“공천 방식부터 재정비하라”

검찰은 이들 세 명의 당선인뿐 아니라 각 정당 소속 비례대표 전반으로 수사를 확대해나가는 움직임이다. 비례대표 당선인 다수가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원 이상 특별당비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특별당비를 낸 것만으로 법적 처벌을 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정당의 당헌·당규나 내부 규약에 의해 당원이 당비를 납부하는 것을 통상적인 정당 활동으로 보고 있다. 정치자금법에도 정당은 소속 당원으로부터 당비를 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특별당비의 근거는 각 당의 당헌·당규에 있다. 당원으로 하여금 특별당비를 납부하게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대동소이하다. 따라서 특별당비가 얼마이든 간에 절차를 지켰을 경우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다. 돈이 정당의 계좌로 들어가 당비로 사용되었다면 합법적인 셈이다. 다만 공직선거법에서 정당의 후보자 추천과 관련해 금품 수수를 금지하고 있어 대가성 여부가 입증된다면 처벌을 할 수 있다. 공천을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내면 죄를 추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당 계좌로 들어가지 않은 ‘뒷돈’이 있을 경우도 처벌 대상이 된다. 양정례 당선인측으로부터 거액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서청원 대표는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뒷돈을 받은 것은 맹세코 한 푼도 없다”라고 강조하며 당내 의혹을 진정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사와 별개로 비례대표 공천 방식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각 분야의 전문성을 보강하고 소외 계층을 배려한다는 본래 취지가 훼손되고 있다는 우려에서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후보 선출 과정이 투명해야 하고 선출 원칙이 공개되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당내 일부 유력 인사들에 의한 ‘밀실 공천’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당원 및 대의원 투표를 통해 공천받은 후보를 최종적으로 추인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비례대표 후보의 명단과 정보 공개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후보에게는 자신을 알릴 시간이, 유권자에게는 후보를 알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총선의 경우 후보 등록일이 임박해서야 명단이 확정·발표되어 검증 절차를 갖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여기에다 지역구 공천까지 늦어지면서 비례대표 후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반감된 측면도 있다. 강교수는 “당내 검증은 물론 언론 검증을 받을 수 있도록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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