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비서실, 권력 이동 시작됐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 승인 2008.04.2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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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검 수사가 오히려 이재용 전무 승계 도운 꼴…2세 체제 전환에 방해되면 ‘누구든 쇄신’ 할 듯

 
삼성그룹 전략기획실과 하부 조직은 지난 4월17일 특검의 수사 결과 발표로 고무되어 있다. 거의 경축 분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특검 수사 결과 발표가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으로 이건희 회장 외동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경영권 승계를 수월하게 하고, 이재용 체제에 맞는 인적 쇄신을 단행할 수 있는 명분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대외 업무를 20년 이상 담당했던 한 관계자는 “특검 발표 이후 여론과 언론의 반발을 어느 정도 예측했다. 특검이 삼성 건을 검찰로 넘기지 않고 종결하기로 한 것에 대해 특검과 검찰이 사전에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안다. 삼성은 이번 일을 처리하면서 사법적인 심판은 최소화하면서 향후 강도 높은 자정 작업과 쇄신 작업을 펼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이런 작업은 이재용 체제로의 전환과 함께 앞으로 2~3년간에 걸쳐 진행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강도 높은 자정·쇄신 작업 2~3년간 이어질 것”

그는 “전략기획실은 물론 삼성그룹의 각 계열사 상무급 이상이면 그 어느 누구도 쇄신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삼성이 사람이 없어서 일을 못한 적은 없다. 삼성은 시스템적으로 일하는 조직이다. 이재용 체제로의 전환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쇄신 대상이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삼성 특검이 결과적으로 이재용 체제로의 합법적인 경영권 승계 작업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이와 관련해 삼성 안팎에서는 수개월 전부터 삼성그룹의 비주력 계열사 임원들이 ‘표정 관리’에 나섰다는 얘기가 들렸다. 삼성전자나 삼성생명 등 주력 계열사에서 잘 나가던 임원들이 특검 과정에서 줄줄이 참고인으로 소환되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소리가 나왔고, 그에 따라 그동안 활동이 많지 않았던 임원들이 쇄신 폭에 따라 주력 계열사나 그룹의 핵심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삼성 특검의 시원은 물론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건이지만 이것이 뉴스의 중심에 놓인 것은 지난 2006년부터다. 이와 관련해 삼성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2006년 8월 성인 오락 게임 ‘바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도박공화국 논란이 터지면서, 코너에 몰린 여권이 국면 돌파용으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증여 건을 여론의 전면에 부상시킬 것을 우려했다”라고 언급했다.
재계에서는 한때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학수 부회장에게 책임을 물리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삼성 특검으로 발화하면서 이회장은 물론 이재용 전무와 홍라희 관장 등 삼성 로열패밀리가 모두 포토라인에 서야 했다. 삼성이 문제의 김용철 변호사를 법무팀장으로 영입한 것도 에버랜드 전환사채 건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증여는 삼성의 대외 명분이나 기업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셈이다. 삼성그룹 고위 경영인 출신인 아무개씨는 이에 대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경영권 후계 문제를 잘못 풀어 책임을 져야 할 인물들이 그룹의 최고 경영진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며 삼성 전략기획실 이학수-김인주 라인을 비난했다.
삼성 임원 출신 중에는 이학수 부회장-김인주 사장 체제가 삼성그룹의 중심이 된 배경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삼성 임원 출신인 한 인사는 “이학수·김인주 씨는 삼성그룹의 참모라기보다는 이건희 회장의 가신 성격이 짙다. 1990년대 초 삼성그룹이 한솔, 신세계, CJ 등으로 분리될 때 현 삼성가를 챙긴 이는 이수빈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원로 경영인이다. 이학수씨는 외환위기 때 환율이 불안정한 틈을 활용해 이회장의 해외 자산을 포함한 개인 재산을 크게 불려준 것으로 알고 있다. 이회장이 이 점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게 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부회장의 오른팔은 전략기획실 김인주 사장이다. 김사장은 1980년에 비서실에 들어온 이후, 재무팀에서 이회장의 재산을 관리해왔다.

“이건희 회장, 6년 전 이학수 부회장 버릴 타이밍 놓쳤다” 평가도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부분은 삼성재팬의 인맥과 역할이다. 삼성재팬에는 이회장을 보좌하는 비서팀이 별도로 있고, 김인회 상무가 팀을 이끌고 있다. 삼성그룹의 일본 현지 독립법인인 삼성재팬의 사장은 전통적으로 삼성 비서실(구조조정본부) 비서팀장 출신이 맡아왔다. 삼성 인력개발원 상담역으로 있다가 최근 물러난 정준명씨도 비서실 비서팀장 출신으로 삼성재팬 사장을 지냈으며, 현 사장인 이창열씨도 구조조정본부 비서팀장 출신이다. 이병철 회장이나 이건희 회장 등은 연중 일본에 머무르는 기간이 길었다. 때문에 삼성재팬에 그룹 전략기획실의 비서팀에 버금가는 기능을 수행하는 팀이 필요했다.
이학수 부회장은 2002년 대선 전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검찰 조사를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한 그룹 관계자는 “이부회장이 어쨌든 집행유예로 사법 처리를 당함으로써 이회장 입장에서는 이부회장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라고 언급했다.
이회장이 이부회장을 버려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평가도 있다. 2002년 대선에서 이부회장의 부산상고 동문인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부회장에게는 행운이었다. 이학수 부회장의 대표적인 직계 라인으로는 삼성생명의 배정충 사장, 삼성중공업 김징완 사장, 삼성증권의 배호원 사장, 에스원 이우희 전 사장, 삼성 중국 본사의 박근희 사장, 유럽 본사의 양해경 사장 등이 꼽히고 있다.
이부회장이 이끌고 있는 전략기획실은 이건희 회장 체제의 그룹 컨트롤 타워다. 이학수 부회장이 실장이고 김인주 사장이 업무를 총괄하고 있으며, 기획팀장은 장충기 부사장, 홍보파트장은 윤순봉 부사장이다. 홍보파트에서는 이재용 전무의 대외 이미지 메이킹 작업을 전담한다.
이전무는 수년 전부터 재벌 2, 3세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PI(President Identity)팀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초 삼성은 홍보팀장이었던 이순동 사장이 전략기획실장 보좌역으로 물러나면서 신·구 홍보 라인 간 불협화음으로 인해 대언론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평가도 나왔다. 재무팀은 최광해 부사장이 맡고 있다. 해외 사업은 기획팀 관할이었지만, 지난 2000년 지승림 전 기획팀장 퇴임 이후에는 이 업무가 재무팀으로 넘어갔다.
해외 사업장에도 역시 이학수 부회장의 라인이 포진하고 있다. 양해경 유럽삼성 사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부회장과 같은 대학 출신이다. 유럽삼성에서 근무했던 전 삼성 직원은 “양사장은 이회장이 유럽 출장을 올 때에는 동분서주한다. 그 외에는 사무실에서 그를 보기 힘들다”라고 말한다. 비서팀은 김준 전무가 맡는다. 각 팀에서 이회장에게 올라가는 최종 보고서는 비서팀을 거친다. 김전무 밑에는 이회장의 한남동 자택 집사 출신인 김문수 상무가 있다. 경영진단팀은 최고 경영진의 교체나 신임 경영진의 조직 장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또는 전 경영진의 반발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해당 사업체를 감사하는 기능을 한다.
법무실은 전략기획실의 통제를 받는 별개 조직이고, 이순동 전략기획실장 보좌역은 현재 이학수 부회장의 자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학수 부회장의 힘은 외환위기 이후 더욱 굳건해졌지만 그때부터 삼성은 미래 전략 부재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취임 6년차인 1993년 ‘신경영’ 체제를 선언하고 자동차·유통·영상 등 신수종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업 조직 문화의 자율성이 요구되는 유통 및 영상 사업은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포기했다. 자동차 사업도 포기했다.
자동차 분야는 이병철 선대 회장 때부터 삼성그룹의 숙원 사업이었다. 자동차 사업은 진입 장벽이 높아 1995년에야 론칭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삼성은 어렵게 진입시킨 자동차 사업을 1999년 IMF 경제 체제 하에서 ‘12·7 청와대에서의 정재계 합의 조치’에 따라 포기했다. 자동차 사업은 외부 경영 환경 및 압력 때문에 포기했던 것으로 비치고 있으나, 사실은 이학수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삼성 재무 라인들이 파워 게임에서 신규 사업을 주도하던 기획 라인들을 제압한 후 스스로 접은 것이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전직 고위 임원을 지낸 아무개씨는 IMF 경제 체제 하에서 재무팀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는 “당시 김우중 회장이 언급한 정체불명의 2백억 달러 부채 중 100억 달러는 대우 것이었고, 80억 달러는 삼성전자·삼성물산 등 삼성 것이었다. 당시 금리가 20~30%를 넘었는데, 재무팀은 회사채를 발행해서 상환하는 방식을 택했다. 당시 환율이 1천8백~1천9백원이었다. 기획팀에서는 이러한 부채 상환 방식에 반대했다. 결국 그 다음해인 1999년에 회사채를 다 갚았는데, 고리 이자, 환율 차액 등 1조원대의 손실이 발생했다”라며 당시 삼성의 자동차 사업 포기 등 구조 조정 작업이 재무팀의 다른 부문의 정책 실수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했다.

 

“삼성 특검 사태 정리 위해서도 이부회장 물러나야”

당시 자동차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측에서는 삼성전자와 삼성자동차의 합병안을 내놓기도 했었다. 자동차 사업 계속 추진을 주장했던 한 임원은 “이회장이 금융·재무를 알았더라면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면서 아쉬워했다. 자동차에서 회군한 재무파들은 전략기획실을 장악하며 이후 전성시대를 누렸다. 신규 사업 발굴 능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삼성그룹의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가 기록적인 순이익을 올리면서 주주 가치 실현이라는 명목 아래 2004년 이후 지금까지 총 9조5천억원어치의 자사주를 매입하기도 했다.
삼성 특검을 계기로 이학수 부회장이 이번 인적 쇄신에서 이회장과 동반 퇴진할지, 아니면 안정적인 이재용 체제 구축을 위한 다리 역할까지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이건희 회장은 21년 전 취임한 뒤 그룹 내 경영진을 아군과 적군으로 확실하게 구분했다. 현재 삼성그룹의 사장단 대부분은 정서적으로 ‘친 이학수 부회장’으로 분류된다. 이들이 이부회장의 잔류를 원하겠지만 삼성 특검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정리하기 위한 명분 때문에 이학수 부회장의 거취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삼성에서 최고 경영진 자리까지 올랐던 아무개씨는 “선대 회장 시절에도 재무 라인은 막강했으나, 선대 회장은 일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이러한 경계를 없앴고 이로 인해 재무파가 득세했다. 하지만 이는 3세 체제 출범에는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학수 부회장을 정점으로 한 그룹 전략기획실은 사업보다는 오너 체제 유지에 역량을 쏟아부었음에도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 작업을 완벽하게 진행하지 못했다. 오히려 삼성 특검이 이에 대한 종지부를 찍어주는 아이러니를 빚고 있다. 지난 4월11일 특검 수사를 받고 나서 이건희 회장은 “도의적이든 법적이든 내가 모두 책임지겠다. 아랫사람에게는 선처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아랫사람에는 이재용 전무도 들어간다. 재계에서는 이회장의 이 발언을 이전무의 경영권 승계에 나타난 걸림돌을 그가 모두 치우겠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이건희-이학수 시대는 저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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