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을 살려야 경제가 산다”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8.04.2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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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 ‘파산예방법’ 전격 통과시켜…부시, 장점보다 후유증 커 거부권 행사할 수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 사는 에디 세피다 씨는 최근 일생 일대의 위기를 맞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압류당한 것이다.
세피다 씨는 지난 2003년 샌디에이고 근교에 44만 달러를 주고 집을 장만해 3만2천 달러를 들여 단장했다. 그런데 현재 이 집 시세는 32만 달러에 불과하다. 집값이 지난 4년 동안 32% 하락한 것이다. 집값이 떨어지자 돈을 빌려준 은행에서 이자율 조정을 요구해와 2년 전부터 월이자를 7백 달러씩 더 물고 있다.
세피다 씨는 늘어난 융자금 이자를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힘든 야간 작업에도 생각처럼 수입이 늘어나지 않아 월이자를 제때 납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집 가격의 70%를 은행 융자금으로 충당했던 그는 현재 시세로 집을 팔아서는 은행 빚마저 갚지 못하게 되었다. 집을 아예 포기하기로 했고, 결국 은행에서 압류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세피다 씨 가족이 홈리스가 되었는지, 싼 월임대료를 내는 아파트로 이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집을 날린 것만은 분명하다. 지난해 여름 시작된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로 미국 부동산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서 세피다 씨와 같은 사례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어림잡아 미국민 50만9천명이 집을 압류당해 길거리에 나앉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세피다 씨와 같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미국 의회가 발벗고 나섰다. 이른바 ‘파산예방법’의 입법을 추진한 것이다. 상원은 지난 4월10일 민주·공화 양당의원 100명 가운데 86명의 찬성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매물로 나온 압류 주택을 구입하는 사람에게 7천 달러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재산세도 최고 1천 달러까지 삭감하기로 했다. 또 주택 건설업자에게는 3년간 세금을 미루어주기로 했다.

압류 주택 구입자에게 세금 감면, 건설업자에겐 3년간 세금 유예

파산예방법은 주택 건설업자와 주택 소유주들에 대한 세금 감면 및 유예를 위해 연방 예산 1백50억 달러를 배정하고, 융자회사의 자금난을 해소해주기 위해 각 주 및 시정부가 압류 주택을 구입할 수 있도록 40억 달러를 확보하는 한편 압류에 몰린 주택 소유주들을 위한 상담 경비로 1억5천만 달러를 할당했다. 이번 파산예방법이 발효하게 되면 일단 주택 압류 발생 건수는 주춤해지거나 어느 정도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법안은 당초에는 압류 통지를 받은 주택 소유주가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할 경우 파산법정 판사가 융자 은행에 이자율 조정을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조항은 표 대결에서 46 대 48로 부결되어 최종 통과 법안에서는 빠졌다. 융자 은행들의 집요한 의회 로비의 결과였다.
미국 의회가 서브프라임 사태의 여파로 미국 내 다섯 번째 투자전문회사 베어스턴스의 파산 위기가 발생한 지 몇 주 만에 법안을 전격 통과시킨 것은 이례적이다. 법안 하나 처리하는 데 몇 년씩 걸리는 일이 허다한 의회가 서민 경제를 위해 발빠른 행동을 보인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상원의 파산예방법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거부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법안은 장점보다는 차후 발생할 후유증이 더 크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이유에서다. 주택 소유주들이 의도적으로 파산 상태를 만들어 융자회사들을 곤경에 빠뜨릴 소지도 있다는 것이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이 법안은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을 더 많이 만들어낼 것이다”라고 걱정한다. 공화당 소속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은 기본적으로 정부나 의회 등 국가 기관이 시장에 개입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해왔다. 부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리라는 예측과 달리 민주당 의원들은 부시 대통령이 이 법안에 결국 서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민생 법안에 대통령이 감히 딴죽을 걸지는 못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전 여러 분야에서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2백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액이 납세자들의 세금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핵심이었다. 무분별한 융자로 서브프라임 사태를 촉발시킨 은행들이나, 자신의 집을 지키지 못하는 무책임한 압류 주택 소유주들을 왜 다른 국민이 구제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다르다. 이들은 미국 주택 경기 침체에는 융자 상환 능력에 대한 책임 추궁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얽혀 있다고 설명한다. 우선 주택 압류의 증가로 융자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파산 위기에 몰려 있다는 것이다. 초대형 융자회사인 컨트리와이드의 자금 위기에 이어 미국 자본 시장을 뒤흔든 베어스턴스 파산의 경우 연방준비은행이 290억 달러를 긴급 수혈함으로써 파국 직전에 일단 불은 껐지만 제2, 제3의 컨트리와이드나 베어스턴스의 출현을 대책없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미국 경제를 되살리려면 부동산 침체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압류 주택 증가는 주변 주택 가격에 영향을 미쳐 가격 하락을 부채질한다. 부동산 가격 하락은 부동산 시장의 위축을 불러온다. 결국은 주택 건설업자들이 자금 위기에 몰리게 되고 융자회사들의 융자 기피로 부동산 구매자들이 집을 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부동산 시장은 더욱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건전한 주택 소유주도 부동산 시장 위축으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거나 직장을 옮길 수조차 없어지게 되어 발목이 잡히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버냉키 연준 의장도 연방 이자율 내려 융자 은행에 ‘숨통’

부동산 가격 하락과 이자율 상승은 미국민의 은행 잔고를 바닥내고, 소비를 줄이고 결과적으로 제조업체나 관광 등 서비스업체에 이어 소비 산업 전반에 걸쳐 경기 침체를 촉발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즉 부동산 시장 위축은 단순한 주택 확보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미국 경제의 사활과도 이어져 있다는 견해가 법안 찬성론자들 사이에 제기되고 있다.
부시 대통령도 나름으로 난국 타개를 위해 소비 활성화를 위한 조처를 취하고 나섰다. 오는 5월부터 국민 1인당 최고 6백 달러씩 세금을 돌려주기로 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같은 세금 환불이 악순환에 걸린 소비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50만~60만개의 일자리를 새로 창출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부시 대통령에 이어 연방준비은행의 벤 버냉키 의장도 부동산 경기 부양을 위해 최근 잇달아 연방 이자율을 내렸다. 우선 주택 융자 상환에 숨통을 트이게 함으로써 융자 은행들의 자금난을 완화하고, 회복된 자금으로 새로운 융자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부동산 시장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융자 시장 규모는 모두 30조 달러에 달한다.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융자금 회수가 줄면서 융자 은행의 자금 부족분은 9천억 달러에 이른다. 9천억 달러는 전체 융자 시장 규모의 3%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재의 이자율 하락 조정만으로도 진정 국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버냉키 의장의 생각이다.
버냉키 의장의 이같은 구상과 예측은 최근 사상 최고 기록을 연달아 깨고 있는 유가와 주식시장의 유동성 심화로 인해 설득력을 잃고 있다. 버냉키 의장 역시 최근 연설에서 미국경제가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침체에 들어갈 수 있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미국 경제가 단순히 부동산 경기에 의해 좌우되지 않음을 시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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