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수를 뻗어서 나를 찾아 떠난다”
  • 심정민 (무용평론가) ()
  • 승인 2008.04.28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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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회를 통해 본 무용가 홍승엽의 신작 <뿔> / “자신을 진화시키기 위해서는 내 안의 정보 변화시켜야”

 
홍승엽(1962년생)의 이력이 특이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평범한 공학도였던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춤에 미쳤다. 오랜 방황 끝에 춤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나 할까. 이후 홍승엽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자유롭게 유영하기 시작했다. 현대무용을 전공한 지 2년 만에 당시 권위를 자랑하던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까지 받았으니, 춤에 대한 그의 재능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다.
홍승엽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이른바 잘 나가던 현대무용가가 20대 말에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다. 늦깎이 발레리노(남성 발레 무용수)로 변신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충동적인 전향은 아니었던 듯하다. 서유럽의 무용가들이 발레와 현대무용을 융합한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93년은 홍승엽이라는 무용가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된 해다. 우선 자신의 분신 같은 무용단 ‘댄스시어터 온(Dance Theatre ON)’을 창단했다.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하면서 대중에게 친숙한 무용가가 되었고, 또 출연료 2천여 만원으로 연습실까지 마련했다.
1993년이 전환의 시기라면 2000년은 최고의 해였다. <달 보는 개>와 <데자뷔>가 프랑스 리옹댄스비엔날레에 초청되어 호평을 받은 것이다. 리옹댄스비엔날레의 예술감독 기 다르메가 홍승엽을 가리켜 ‘동양에서 온 윌리엄 포사이드’라고 부른 일은 오랫동안 회자되기도 했다. 홍승엽은 두 작품에 대해 ‘<달 보는 개>는 단원들의 기량이 나의 요구에 근접했던 작품이고,  <데자뷔>는 그들이 가장 춤추기 좋아하는 작품이기에’ 애착을 느낀다고 말한다. 홍승엽은 현재 안애순, 안은미, 안성수 등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LG아트센터는 뉴욕으로 치면 BAM(브루클린음악아카데미)과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극장이다. BAM은 실험적이고 급진적이면서도 탄탄한 예술성을 갖춘 무용가들을 많이 소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LG아트센터 역시 비슷한 성향의 세계적인 무용가들을 초청해왔다. 피나 바우쉬, 매튜 본, 오하드 나하린, 빔 반데키부스,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 에두아르 록 등이 그들이다.
LG아트센터가 꾸준하게 공동제작을 하는 국내 예술가로는 홍승엽이 거의 유일하다. LG아트센터 공연기획팀의 최정휘씨는 “댄스시어터 온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용단 중 하나로 레퍼토리를 안정적으로 만들어가는 우수한 단체”라고 말한다. 댄스시어터 온의 홍승엽은 다작을 내놓지는 않는다. 구상과 안무에 집중하는 기간을 길게 잡고 작품을 완성시킨다. 그래서인지 작품들 간의 편차가 그리 심하지 않다. 이를테면 한 작품은 기가 막히게 좋다가 그 다음 작품은 형편없다든가 하는 경우가 없다. 홍승엽의 작품 수준에 대한 LG아트센터의 신뢰가 네 번째 공동 제작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홍승엽의 세련된 춤은 현재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서유럽 현대무용과 닿아 있고, 작품 성향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타진하며, 넘치는 자신감은 스스로를 누구와도 차별화시킨다. 이런 요소들이 극장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공연을 한 달 반쯤 앞둔 지난 4월15일 아차산 근처에 위치한 홍승엽의 연습실에서는 <뿔>의 시연회가 있었다. 시연회란 작품을 무대 위로 올리기 전에 간단하게 선보이는 중간 발표회다. 우리 무용계에서는 그다지 보편화되지 않았지만 북미나 서유럽 무용계에서는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시연회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다. 공연 당일에 좀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발표하기 위한 것이다.
 

15장면 중 4장면, 40분가량 선보여

아쉽게도 <뿔>의 시연회에서는 음악이 완성되지 못한 관계로 다른 음악에 맞춰 춤이 추어졌다. 춤 역시 15장면 중 4장면, 40분가량의 분량이 선보였다. 작품의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몸 이곳저곳에 파스를 붙이고 열심히 움직이는 무용수들은 연습실을 후끈 달궈놓았다. <뿔>의 한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매 박자마다 쉴 새 없이 움직여간다. 다리를 번쩍 들고 높게 도약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나열되는 세밀한 동작에는 그 이상의 에너지가 투입되고 있다. 전작들보다 동작이 다양해졌다는 인상까지 받을 수 있었다.
시연회가 끝난 뒤 홍승엽은 <뿔>에 대해 직접 소개했다. 여기서 ‘뿔’은 촉수, 즉 달팽이의 촉수에 가깝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진화를 위해 또 하나의 촉수를 만들어내고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들이 수용한 것들은 각각 개성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전체를 놓고 볼 때 모두 똑같다. 홍승엽은 결국 “자신을 진화시키기 위해서는 밖에 있는 정보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정보를 변화시켜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가 그려내는 현대인의 자화상은 오는 5월30~31일 LG아트센터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적인 거장들 가운데 누구로부터 영감을 받았는지에 대한 물음에 그는 답한다. “모리스 베자르는 거의 신적인 존재고, 지리 킬리안이나 매츠 에크도 좋아한다.” 베자르와 킬리안 그리고 에크는 모두 발레를 기본으로 하면서 현대무용을 받아들였다. 또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기보다는 그 전형을 깨부수는 독창적 감각으로 작품을 창조했다. 홍승엽 역시 이러한 방향성을 띠고 있으니 그들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홍승엽은 발레와 현대무용을 아우르면서도 그 춤들의 정형성을 도발적으로 변화시킨다. 이를테면 박자에 맞춰 동작을 세밀하게 분절시키는가 하면, 관절을 활용해 동작의 순방향과 역방향을 교차시킨다. 홍승엽의 작품에서 음악·장치·의상은 각각 독립적인 매력을 지니면서도 철저히 춤에 의해 통제되는 절제미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또 홍승엽은 인간 내면의 복잡 미묘한 갈등 구조를 남다른 아이디어로 세련되게 그려낸다. 
독특한 점은 홍승엽의 작품들에서 무용수들은 모두 무표정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파’를 싫어하는 그가 작품 속에서 무채색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무채색은 공허한 흰색이 아니다. 모든 색이 빼곡히 들어가 있는 검정색이다. 검정색으로부터는 보는 이가 어떤 색이든 자유롭게 뽑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의 작품 스타일을 읽을 수 있다.
홍승엽의 작품들은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다. 최근의 많은 현대무용이 그러하듯이 서사적인 설명이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십수 개의 장면에 일련의 이미지들을 분산시켜 놓고 있다. 그 이미지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작품 전체를 통해 어떤 중심된 의미를 유추해내게 한다. 신작 <뿔>에서 그 중심된 의미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아 찾기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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