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가서 본 건 관광지뿐”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 승인 2008.05.0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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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되었다가 돌아와 처벌 받은 후 간첩 교육 받았다고 조작돼 다시 옥살이
ⓒ연합뉴스
군 사 정권 시절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어민들은 이중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대부분 생계를 위해 조업에 나섰다가 북한 경비정에 끌려간 이들은 수개월 억류되어 있는 동안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할까 봐 불안감에 떨어야 했고, 정작 고향에 돌아와서는 범죄자로 전락해 수사기관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68년 11월 내무부는 나포된 선원들이 지형, 지물, 경비초소의 위치 등 국가 기밀을 북한에 제공해 무장 공비의 침투를 도와준다는 판단에 따라 남한 어선이 어로저지선과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수산업법과 반공법을 적용해 모조리 구속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서창덕·정삼근 씨도 1969년 이에 따른 처벌을 받았다. 서씨는 1967년 5월 승룡호의 선원으로 동료 6명과 황해도 구월봉 앞바다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피랍되어 1백24일간 북한에서 체류한 후 같은 해 9월에 귀환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서씨는 반공법상 고무찬양죄 및 수산업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씨도 1968년 6월 영창호의 선원으로 승선해 연평도 근해에서 조업 도중 피랍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귀환한 후 이듬해 2월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전주교도소에서 8개월을 복역했다.
납북되어 돌아온 어민들이 이같은 죄명으로 처벌받은 경우는 적지 않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판결문으로 확인된 수산업법 위반 재판 건수만도 3천6백건에 이른다. 이 중 3심까지 간 재판도 1천2백건이나 되며, 처벌받은 어민 수는 1천5백~1천8백명으로 추정된다.

납북되었다 귀환하는 어민 수가 적지 않고 수사 강도에 비해 처벌 수위가 크게 높지 않아 당시에는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때 경찰의 고문 등에 의해 작성되었던 진술서가 이후 간첩 조작의 주요 근거로 활용되었다는 데 있다. 서씨와 정씨도 마찬가지였다. 납북되어 돌아온 지 16~17년이 지나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당시 북한 지도원에게 포섭되어 간첩 교육과 특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조작된 것이다. 귀환 후 관공서에서 단체로 보내준 군산화력발전소 시찰까지도 국가 기밀을 탐지하기 위한 간첩 행위가 되었다.

정삼근씨는 “북한에 있는 동안 대동강수양소에 있었는데 남한에서 잡혀온 선원이 1백50여 명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 버스에 태워서 주변 관광지 구경을 시켜주고 잘사는 농촌 모습도 보여주고 했는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커튼을 쳐서 못 보도록 했다. 자기네들이 잘 먹고 잘 산다고 자랑한 것이 고작이었지 무슨 간첩 지령을 받거나 한 적은 절대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정씨는 “3개월 후에 배 몇 척이 함께 내려왔는데 내려오자마자 군산경찰서에서 잡아가 여관방에 한 명씩 집어넣고는 ‘왜 교육을 안 받았다고 하느냐’고 닦달을 하면서 한 달간 때리고 고문했다. 그때도 억울하게 징역 1년을 살았지만 나중에 간첩 누명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조작 사건’으로 진실 규명 결정을 받은 서씨와 정씨는 현재 법원에 재심을 신청해놓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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