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 고시’부터 연기하라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 승인 2008.05.09 14:3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우병 발견 후 수입 중단’은 또 다른 문제 야기…재협상 통한 위생 검역 강화가 최선의 대안

ⓒ시사저널 박은숙
2년 전의 기억 하나. 2006년 3월6일, 농림부는 한·미 FTA 협상 개시의 선결 조건 중 하나였던 미국의 쇠고기 수입을 허가했다. 생후 30개월 미만의 쇠고기 중 뼈를 제외한 부분에 한해 수입을 재개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하지만 농림부의 발표는 곧 우습게 되어버렸다. 발표 1주일 후인 3월13일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광우병에 걸린 소가 발견된 것이다. 수입 개방을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차일피일 시간을 끌다 같은 해 10월부터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시간을 끌 수라도 있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미국에서 광우병에 걸린 소가 발견되더라도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막을 수 없다. 농수산식품부가 지난 5월5일 공개한 ‘한·미 쇠고기 협상 합의문’을 보자.

4조에 따르면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할 경우 미국 정부는 역학조사를 실시해야 하고 그 결과를 한국 정부에 알려야 한다. 그러나 광우병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정부가 쇠고기 수입을 막을 수는 없다. 국제수역사무국(OIE)이 미국의 광우병위험통제국 등급을 낮추지 않는 한 한국 정부는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의 수입을 중단할 수 없다. 광우병 소의 수입 중단 여부를 OIE에게 맡긴 셈이다.

OIE는 광우병의 위험을 판단하는 단체라기보다는 농업담당 정부기관 대표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이 짙다. 마이클 핸슨 미국 소비자연맹 수석연구원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OIE를 조정하고 있으며 OIE는 과학보다는 정치에 기반을 둔 모임이다”라고 밝혔다.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도 “전세계 어느 나라도 현재 국제수역사무국 기준을 따르는 나라가 없다”라고 말했다. OIE는 이전부터 미국의 쇠고기가 수출될 수 있도록 근거 규정을 마련해주면서 세계 곳곳의 비난을 받아왔다.


“OIE는 과학보다 정치에 기반을 둔 모임”

게다가 등뼈(T-bone)에 대한 연령 표시를 하는 것도 영문 합의문에 따르면 1백80일만 하도록 했다. 등뼈는 특정위험물질(SRM)이 많이 발견되는 부위다. 또 23조에 따르면 검역 과정에서 SRM이 발견될 경우, 미국 식품안전검사청은 해당 문제에 대해서 원인을 조사하지만 해당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계속 수입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수입을 중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후 해당 공장에서 수입되는 쇠고기에 대해서 검사 비율을 높이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30개월이 넘는 소의 경우 과거에는 월령 표시를 미국 정부에서 해주었지만 이번 합의문에서는 그런 장치가 빠져 있다. 광우병 발병률이 높은 30개월이 넘은 소인지 여부를 알지 못한 채 식탁에서 쇠고기와 만나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종합해보면 우리 국민의 식탁 안전망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협상 합의문이 공개되고 반대 여론이 점차 커지고 있지만 정부의 상황 인식은 변할 것 같지 않다. 지난 5월6일 민동석 농업통상정책관은 “OIE가 미국의 등급을 변경하지 않는 한 협상은 이미 종료되었고 재협상은 불가능하다”라고 못박았다. 이상길 농림수산식품부 축산정책단장은 “미국측의 요구를 거부하기 위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라고 설명했지만 농림수산식품부의 다른 관계자는 “혹시 발생할지 모를 통상 마찰에 너무 신경을 쓰고 있다”라고 말했다.

협상에 임한 자세와 원칙부터 가다듬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OIE 규정보다 강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태도를 유지해왔었다. 지난 2007년 8월 미국산 수입 쇠고기 검역 과정에서 위험물질이 발견되자 한나라당은 “검역 중단 등의 미온적인 조치가 아니라 금수 조치를 바로 내리라”라고 말하며 강력한 대응 조치를 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180도 말이 바뀐 셈이다.


OIE 권고 기준보다 높은 수준의 검역 조치 취하는 나라 많아

ⓒ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5월7일 업무보고를 받기 위해 전라북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 수입 중단 조치를 취하겠다”라고 전격적으로 밝혔다. 여론이 악화되고 대통령의 지지도가 20%대로 떨어지면서 내린 고육지책이다. 같은 날 강재섭 대표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한 것으로 봐서 당정 간에 어느 정도 교감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나온 결론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미국에서 다시 광우병이 발생해도 우리가 자의적으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검역 중단 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서툰 접근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번 발표를 ‘미국 얼굴만 바라보는 발언’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말도 나온다. 경실련의 한 관계자는 “이야기를 하려면 재협상 이야기를 해야지 미국과 이미 합의한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정부 스스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자백하는 것과 똑같다”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의 경우 대부분 OIE의 권고 기준보다 높은 수준의 검역 조치를 취하고 있다. 우희종 교수(서울대 수의대)는 “OIE의 기준은 2002~2003년의 연구 결과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5년 전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5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OIE 총회에서 토시로 카와시마 일본 대표는 “세계무역기구 위생검역 협정에 따르면 회원국은 OIE 기준에서 권고하는 조치보다 엄격한 위생 검역 조치를 적용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OIE 규정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20개월 미만의 소만을 고집하고 있으며 타이완과 중국 등 우리의 뒤를 이어 미국과 상대해야 할 국가들도 30개월 미만의 소만 고집할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은 재협상을 통해 위생 검역을 강화하는 것이다. “민간 업자들이 알아서 30개월 이상은 수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청와대가 무책임한 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완전히 풀어버린 연령 제한을 재협상을 통해 다시 묶어야 한다. 30개월 이상의 쇠고기라도 단가가 낮다면 학교 급식이나 군대 등으로 공급될 개연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또 미국에서 광우병이 재발생할 경우 OIE의 권고와는 상관없이 우리 정부가 자체적으로 수입 금지 조처를 내릴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송기호 변호사(민변)는 지난 5월7일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사실상 우리의 수입 중단 권한을 우리 스스로 판단할 검역 주권의 핵심이 포기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물론 이런 모든 작업을 위해서는 농림부장관이 고시를 연기해야 하는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이번 쇠고기 협상 합의문은 농림부장관이 고시를 해야만 효력이 발생한다. 고시를 연기해야 재협상의 시간과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농림부장관의 고시는 5월15일로 예정되어 있는데 고시의 연기는 내부 합의 절차의 문제이기 때문에 국제법상 아무런 하자가 없다. 결국은 정부의 의지 문제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광우병 위협으로부터 한 사람이라도 지켜내겠다는 목표를 설정한다면 고시를 연기하고 위생 검역 조건을 강화하는 것이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물론 그런 목표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