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까지 튄 ‘위작 시비’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승인 2008.05.2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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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전면적 조사•감식으로 확대될 듯 작품의 진위에만 매달리는 사회 풍토도 문제

ⓒ연합뉴스
또다시 미술품에 대한 위작 주장이 제기되어 착잡한 심정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서화 감정 전문학자인 이동천 박사가 현재 통용되고 있는 천원권 지폐의 이면을 장식한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보물 제585호·개인 소장> 자체가 위작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제 위작 시비가 국보급 작품들에 대해서도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위작 공포의 강도가 더욱 커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동안 이중섭·박수근·천경자 등의 작품들에 관한 위작 주장들이 제기되어 적지 않은 논란과 함께 미술계에 엄청난 충격파를 몰고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위작 논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더욱이 이번에 제기된 주장은 국보이자 법정 통화 지폐에 실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사안 자체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나마 미국산 쇠고기 정국에 가려 있어 직접적인 스포트라이트는 조금 비켜간 상태이지만, 정밀 감정과 감식을 거쳐 위작으로 판명이 난다면 미술계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혼란을 줄 희대의 사안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일련의 위작 시비가 꼬리를 물면서 제기되고 있는 현재, 불신과 의혹이 계속 증폭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시비의 결과는 우리 문화계 전반에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어차피 우리 문화가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진통으로서 여러 가지 대책과 대안으로 극복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들도 적지 않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 대책이라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감정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문제는 시급한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진 고미술 작품들에 대해서는 화포 및 안료에 대한 연대 측정 방법과 필치나 구도, 통계적 소재 등에 대한 분석과 비교 등으로 판명하기는 용이한 편이다. 그러나 이번 주장은 적어도 국보급 작품들에 대해 전면적으로 조사와 감식을 확대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엄청난 인력과 예산 또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문화재 상시 감정할 수 있는 전문 시스템 확보 시급

과학적 감식과 조사의 방법이 그래도 가장 설득력 있는 공정한 방법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우리의 박물관·미술관이나 감정 기관들이 보유하고 있지 못하며, 그런 시설의 접근이나 활용 자체가 쉽지 않다. 전문 인력을 많이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문화계에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필적할 만한 연구 기관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수사 기관의 요청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문화재 감정을 위해 활용되는 전문 시스템의 확보야말로 시급한 일이다.

최근의 위작 시비들에 영향을 받아 몇몇 대학들에서는 감정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학과를 설립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 수요는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품 감정 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전문 감정사들이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미술사나 비평 분야에서도 특정 작가들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전문인들이 많이 배출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시행되는 감정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지적들이 많다는 데 있다. 감정의 대상이 되는 작품들에는 대다수 미술관, 경매사, 혹은 화랑들이 관련되어 있다. 또한 감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조차 그러한 기관이나 업체들과 어떤 식으로든(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감정을 할 수 있는 엄격한 시스템이 확립되지 않으면 공신력을 얻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교환 가치’에 기운 진위 논란보다 미술사적 분석과 정리 필요

ⓒ시사저널 박은숙
또 하나, 감정 차원의 연구를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사회적 한계도 중대한 걸림돌이다. 얼마 전 한 경매에서 낙찰된 박수근의 작품에 대해 위작 의혹을 제기한 측이 엄청난 손해배상 소송에 몰려 있다. 물론 의혹을 제기하거나 연구를 하는 것이 좀더 책임 있게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법정으로까지 간 이 사건은 결과와 상관없이 감정 관련 연구나 소통을 크게 위축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의혹 제기 자체만으로도 사유 재산의 가치를 폭락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공공재에 가까운 일정한 문화재 수준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공권력 차원의 감정 요구에 응하게 하는 법제도 고려해 봄 직하다. 개인 자격의 연구자는 대상이 되는 작품에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의혹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미술품 감정에 있어 가장 취약한 부분은 해당 작가들이 작고한 지 반세기 정도 지난 개화기로부터 이중섭·박수근 등이 포함되는 1960년대 무렵까지의 작품들이다. 이 경우는 과학적 측정의 근사치 범위에 포함되는 시간대이며, 아울러 심층적인 미술사적 분석과 정리가 채 이루어지지 않아 인적 관계의 증언과 자료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관련 자료들과 행적 및 기록들을 유족은 물론 학계에서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문화재로 분류하기에는 이르지만 이러한 작품들에 대해 대대적인 자료 공유와 정리를 전개하는 사업도 절실하다. 이를테면 운보 김기창이 생존시에 모든 소장자들에게 공지해 작품을 등재시키고 감정한 후 전작 도록을 제작했던 것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어떤 작품의 진위 문제에만 매달리는 우리 사회의 풍토다. 대단히 중대하지만 그러한 감정의 문제는 엄밀히 사용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에만 기울어져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자체가 누구의 것이냐는 사실 교환 가치 즉, 금전적 가치만을 따지는 것이지 작품 자체의 본질은 아니다. 이런 가정을 하나 해보자. 만약 이번에 시비가 되고 있는 작품이 정선과 동시대 작가의 것인데 단지 정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렸던 것이라 가정하자(물론 이럴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간혹 제자들이나 친구들이 이름만 도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했을 때 그 작품을 위작이라는 죄목으로 폐기해야 하는 것인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것’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에 주목하는 문화적 성숙을 더 기대하기 때문이다. 심미적 경험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문화 고유의 가치는 소멸되고 본질 외적인 것에만 매달리는 환경 자체가 우리 시민들에게 문화예술에 대한 무관심을 부채질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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