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조직을 시장 중심으로 개편 해야 한다”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 승인 2008.05.27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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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 “글로벌 마켓 기준 적극 도입 필요”…새 정부 입각 제의 받았지만 고사해

ⓒ연합뉴스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재직 시절 ‘따거’(큰형님)로 불렸다. 3년의 임기 동안 정부의 입장에 반하는 제안을 소신 있게 내놓거나 밀어붙이면서 생긴 별명이다. 최근 빠르게 추진되고 있는 금산 분리 완화나 보험사 상장이 모두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저돌적인 언행 때문에 자주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지난 2007년 1월 김중회 전 금감원 부원장이 수뢰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는 두 차례나 검찰에 탄원서를 제출했다가 청와대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지난 6월21일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거침없고 시원시원한 언변 때문에 시종 귀를 쫑긋 세우고 인터뷰를 해야 했다.

윤 전 위원장은 우선 김중회 전 부원장이 구속될 당시의 비화부터 털어놓았다. 김 전 부원장은 지난해 1월 김흥주 삼주산업(옛 그레이스백화점) 회장의 상호신용금고 인수 작업을 돕는 대가로 2억3천5백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지난 5월8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결백이 입증되었다.

“요즘도 (김 전 부원장을) 자주 만난다. 뇌물이나 받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탄원서를 낼 수 있었다. 변호사 선임을 위해 직원들과 함께 모금 운동도 벌였다. 나중에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청와대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검찰의 구속 수사 관행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내비쳤다.
“김 전 부원장의 사건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진행된 것이었다. 이전에 몇 차례 검찰 조사도 받았다. 그럼에도 ‘증거 인멸 우려’라는 이유로 그를 긴급 체포한 검찰을 이해할 수 없다. 대법원에서는 최근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동안 당한 심적·물적 고통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이제는 검찰도 변해야 한다.”

그는 정부 조직을 시장 중심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한국은 현재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느냐, 여기서 주저앉느냐는 앞으로 하기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의 고도 성장기에는 정부 주도의 경제 성장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도권을 시장에 넘겨야 한다.”

윤 전 위원장은 시장 중심으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마켓 기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일례로 국내에서는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으면 독과점 제재를 받는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점유율도 국제적으로 보면 1%도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잣대를 들이대 시장을 규제하는 것은 허망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규모의 경제가 최근의 대세다. M&A를 통해 덩치를 키우지 못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국내 시장 기준의 법령은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을 글로벌 마켓 기준으로 고쳐야 한다.”

ⓒ이코노믹리뷰 제공
우리의 잣대로 시장을 규제해서는 안 돼

그는 금산 분리 원칙에 따라 국내 자본이 외국 자본에 비해 역차별을 받는 것도 문제라고 강조한다. 이미 시중 은행의 상당수가 외국인에게 넘어간 상태다. 그나마 국책 은행이나 정부 지분이 있는 우리은행 정도가 토종으로 남아 있지만 생존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말을 하면 일각에서는 ‘국수주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다. 곳곳의 물밑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이나 변화를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모든 자원이나 기준을 시장 경제 쪽으로 최적화시키지 않으면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증권업도 마찬가지다.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로 인해 점점 경쟁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산업계에는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차 등 글로벌 기업이 있다. 그러나 금융권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증권사의 자산 규모가 2조원 정도다. 40조원을 보유한 골드만삭스 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늦기는 했지만 내년 2월부터 자통법을 실시하게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는 “최근 우리 경제가 대내외적 환경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유가에 환율 불안, 성장력 저하 등이 겹치면서 향후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현명하게 이겨낼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한다.
“우리나라가 언제 어렵지 않을 때가 있었나. IMF 환란을 비롯해 1, 2차 오일쇼크도 잘 넘겼다. 우리 국민에게는 저력이 있다. 이번 어려움도 잘 이겨낼 것으로 믿는다. 기름값이 오르면 아끼면 된다. 무엇보다 국민과 정부가 똘똘 뭉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최근 청소년들까지 대거 참여하고 있는 쇠고기 관련 촛불 시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쇠고기 문제는 지난 정부에서 풀어야 했다. 그러나 사안이 워낙 미묘하다 보니 현 정부로 넘어온 것이다. 현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만큼 기회를 주어야 한다. 주위에 있는 미국인 친구들이 요즘 한창 벌어지고 있는 촛불 시위를 보고 많이 황당해한다. 한국의 위생 기준이 그렇게 엄격한지, 중고생들이 과연 얼마나 진실을 알고 시위를 하는지 의아해한다.”

그는 금산 분리를 완화하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이 잡혔지만 공론화의 절차를 반드시 거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공론화를 통해 가장 이상적인 정책을 끌어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수정 하고 보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 정부에서 내가 금산 분리 완화를 주장했을 때 뒷말이 많았다. 그때도 내가 강조했던 것은 공론화하자는 것이었다. 그 말이 와전되어 오해를 받았던 것 같다.”
그는 새 정부에서 입각 제의를 받은 바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정부의 일을 할 생각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세대 간 교체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무대 뒤에서 후배들을 지원하는 역할에 만족한다. 새 정부의 입각 제의를 받았지만 고사했다. 앞으로 정부 쪽에서 나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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