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유랑, 어디에서 멈출까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05.27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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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건국 60주년, 1천만 팔레스타인인에게는 ‘대재앙’의 날… 중동 평화 전망 여전히 ‘먹구름’

ⓒ로이터
지난 5월16일은 이스라엘 건국 60주년 기념일이었다. 이스라엘이 이날을 경축하고 있는 순간 뉴욕의 유엔본부 건물 앞에서는 일단의 팔레스타인계 미국인들이 모여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무심한 유엔을 규탄했다. 이스라엘 건국일은 팔레스타인에게는 나라를 잃은 날이다. 아랍어로 나크바(Nakba), 즉 대재앙(catastrophe)의 날이기도 하다. 28세의 한 청년은 60년 전 이날 팔레스타인은 죽었다고 절규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2년간의 전쟁에서 약 10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되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거주지 웨스트 뱅크와 가자 지구까지 점령했다. 현재 1천만명으로 추산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유랑민이 되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의 꿈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 나라가 탄생한 날, 또 다른 한 나라는 없어졌다. 이스라엘 건국 60년은 유대인들에게는 경축일이지만,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추방과 점령과 망국의 설움으로 얼룩진 날이다.

1948년 ‘재앙’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중동의 최대 현안으로, 참담한 비극으로 남아 있다. 이 끝없는 실패의 책임을 따진다면 이스라엘의 허물이 크다. 팔레스타인 땅을 계속 점령하고 점령지에 불법 정착촌까지 건설했으니 말이다. 이스라엘은 말로는 평화를 추구한다며 점령지 철수를 거부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무력에 의한 영토 강점’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유엔 결의안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국제 사회, 팔레스타인, 아랍 국가들에게도 나름의 책임이 있다. 모든 비극의 뿌리는 당연히 이스라엘 건국과 나크바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레스타인에 실지를 찾아주기 위한 노력은 수없이 많았다. 1919년의 킹-크레인 위원회, 1937년의 필 리포트, 1945년의 영·미 공동 조사도 그 일환이다. 그 후에 유엔은 결의안 194호, 242호, 338호를 가결했고 로저스 플랜, 테닛 플랜, 캠프 데이비드 회담, 사우디 플랜, 로드 맵, 제네바 구상, 오슬로 협정, 아랍 평화 구상 등이 이어졌다.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들이 유대인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팔레스타인은 물론 유럽의 반 유대인주의나 나치의 홀로코스트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비극에 눈을 감은 것은 잘못이다.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을 너무 증오한 나머지 그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스라엘인들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자행했다. 팔레스타인과 아랍은 자신들의 ‘합법적’ 요구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했고, 이런 실패는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문제 해결에 장애로 작용했다. 국경을 사이에 둔 분쟁·납치, 아랍과 국제 사회의 외교 노력, 비밀 회담, 비폭력 저항, 자살 폭격, 국제적 평화 특사 등등 파란만장한 굴곡의 시간이 지나갔을 뿐 이스라엘의 점령을 끝내지는 못했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아랍의 공허한 지원을 과신한 끝에 이스라엘의 힘을 정확히 평가하지 못했다. 아랍은 팔레스타인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유럽의 팔레스타인 지원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아랍이 정치적·군사적·재정적 지원을 제대로 했다면 중동 지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미국·독일은 이스라엘에 대규모 원조 계속해와

미국은 팔레스타인을 형식적으로 지원하면서 이스라엘에는 대규모 지원을 했다. 1949년부터 2006년까지 이루어진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규모는 1천80억 달러로 추산된다. 미국 다음으로는 독일이 많은 지원을 제공했다. 독일의 원조는 주로 나치 만행에 대한 배상 형태로 이루어졌다. 총액은 대략 3백10억 달러로 이스라엘인 1인당 5천3백45달러 꼴이다.

이스라엘이 막강해지자 팔레스타인의 독립운동은 이슬람주의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랍어로 하마스로 알려진 이슬람 저항 운동은 1987년의 첫 인피파다(intifada, 봉기) 이후 크게 세를 불렸다. 1990년대 야세르 아라파트가 나타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조직하고 이른바 오슬로 협정의 산물로 팔레스타인 임시정부(Palestine Authority)가 수립되면서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귀향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라파트는 오슬로 협정을 거부한 채 테러만 일삼다가 죽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다시 미궁 속에 빠졌다. 미국은 2008년을 중동 평화의 해로 정하고 평화의 불씨를 지피고 있으나 전망은 어둡다. 1967년의 국경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대신 아랍과 이스라엘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아랍 평화안 역시 실패로 귀착해가고 있다.

60년을 갈등했으면 지칠 때도 되었다. 해결은 간단해 보인다. 팔레스타인이 독립 국가로 자유를 누리는 대신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교환 협정을 체결하면 된다. 그러나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뉴욕 대학의 엘리아스 쿠리 교수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생긴 서방의 ‘원죄’ 의식에서 찾았다. 서방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속죄로 팔레스타인을 죽이면서 이스라엘 건국을 도왔다. 늘 이스라엘의 이익을 우선하고 이스라엘의 불법에는 관대했다. 이스라엘 때문에 인종 청소를 하듯이 고향 땅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아랍 국가의 평화안은 유명무실…팔레스타인의 고난은 ‘일상사’

이스라엘이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순간 적어도 두 가지 진실은 무시되었다. 첫째 이 경축일이 다른 민족에게는 고난의 날이라는 점이다. 둘째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땅 웨스트 뱅크와 가자 지구를 이스라엘이 계속 점령함으로써 나크바는 역사적 사건에서 일상사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즉, 팔레스타인의 고난을 세상이 당연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수많은 평화 노력은 실패했다.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의 철권 정책은 팔레스타인의 명맥을 거의 끊어놓았다.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미래의 팔레스타인 국가 간 관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들 역시 관계에서 대결 일변도로 치우치는 우를 범했다.

팔레스타인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 역대 이스라엘 정부들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궁지에 몰린 팔레스타인은 이란과 손을 잡고 이스라엘과 격하게 대결하는 선택을 했다. 이스라엘은 모든 문제가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는 아랍권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수의 아랍 국가들이 2002년 사우디 평화안을 받아들였으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강제 추방된 희생자들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점을 이스라엘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쌍방이 서로 희생자임을 주장하는 형국이다. 따라서 누가 희생자인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모든 희생자의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완강하고, 아랍권은 분열된 가운데 21세기판 비극의 조짐만이 어른거린다. 중동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가는 임기 말의 부시 대통령이 5월14일부터 5일간 중동을 순방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 편만 들었다는 팔레스타인의 비난을 들으며 빈손으로 귀국했다. 백악관 대변인은 내년 2월 퇴임 전에 부시가 다시 중동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유랑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이들의 고통을 서방이 진정으로 알아주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 60년은 또 다른 비극을 예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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