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새긴 ‘천추의 한’
  • 조철 기자 2001jch@sisapress.com ()
  • 승인 2008.05.2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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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생애 추적한 대필 작가의 독백

불과 한 달 전에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만들겠다던 두 나라 정상 간의 다짐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과거를 묻지 않겠다’라는 식의 태도가 ‘굴욕 외교’라는 항의가 빗발치고, 또다시 도발해온 일본 문부성의 ‘독도 일본 고유 영토론’ 때문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것으로 분석하는 등 파문이 크다. 일본과 ‘실용적으로’ 뭘 해보려 했겠지만 국민 여론이 들끓는데 되겠는가.

일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과’를 받기 전에는 과거를 묻어 둘 수 없는 사람들은 최근의 일들에 분통이 치밀어 오르겠다. 땅에 묻혀도 눈을 감지 못하는 ‘한’들이 벌떡 일어설 것도 같다.

‘고 강덕경. 1929년생, 남강이 흐르는 진주에서 태어났으며 수정동 요시노 소학교를 졸업했다. 열다섯 살 나이에 일본에서 위안부가 되어 악몽 속을 걸었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부산에서 식당 일과 가정부, 포장마차에서 오뎅과 소주를 파는 일을 했다. 부산진 천주교 고아원에서 네 살에 아이가 죽은 후로 결혼하지 않았고 내내 혼자 살았다. 1992년 한국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자신의 고통스런 과거를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를 요구하며 폐암으로 쓰러질 때까지 투쟁했다. 그리고 1997년 2월2일 68세를 일기로 서울 아산병원에서 임종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강덕경씨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에세이가 ‘성토’ 끊이지 않는 5월에 ‘낮은 목소리’를 보태고 있다. 강덕경 할머니의 생전 사진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책은, 타인의 이야기를 대필하는 일로 살아온 저자가 평생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전국을 떠돌며 살아온 강덕경 할머니의 ‘유령 같은 삶’을 추적해가는 이야기다.

ⓒ멘토프레스 제공
말년에 위안부 문제 담은 그림들 남겨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은 말 이상의 강렬한 힘을 지닌 언어이자 메시지다. 저자는 강덕경 할머니가 남겨놓은 <빼앗긴 순정> <마츠시로 위안소> <악몽> <그리움> <책임자를 처벌하라> <새가 되어> 등의 그림들에서 ‘성노예’로서 당시 15세 소녀가 느꼈을 공포와 수치, 상실된 소녀의 꿈,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받아 이를 다시 전하고 있다.

‘강덕경 소녀’의 꿈은 마츠시로 위안소 지붕 위, 붉은 달 속에 살고 있다. 위안소에서 그녀는 직접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아, 산 넘고 바다 건너 / 멀리 천리 길을 정신대로 / 아득히 떠 있는 반도 / 어머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구슬픈 소녀의 노래는 60대 노파가 되어서도 계속된다. 그림을 통해 그녀는, 고바야시 다테오에게 손목이 잡혀 야산으로 끌려가던 밤에 혀를 깨물고 자결했어야 했다고, 그러면 위안소에서 몸을 팔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죽는 그날까지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를 널리 알아주기를, 해결해주기를 소망했다. 강덕경 할머니는 그림으로 마츠시로 위안소 달빛 속에서 상실된 소녀의 꿈을,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을 여전히 이야기하고 있다.

강덕경 할머니는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를 촬영하던 변영주 감독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깊이 생각할수록 이 영화 다 볼 수 있도록. 내가 저 세상에 가서라도 기도할 거고. 그래 가지고 시청자들이 많이 생겨서, 누가 우리 좀 도와주기를. 제일로 간절히 바라요, 내가….” 그녀가 남긴 그림들에도 그런 간절함이 배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강덕경 할머니’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할머니였던 적이 없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가족 없이 부표처럼 떠돌며 소녀인 채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한풀이’가 끝나지 않는 한 강덕경 할머니는 하늘나라에 들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은 할머니가 남긴 그림들에서 절절히 가지게 된다. 일본의 태도가 지금 같아서는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가 평온을 찾은 모습으로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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