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이글거리는 ‘민주’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8.06.0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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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황문성
그해 6월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다. 시청 앞에서, 서울역 앞에서, 남대문에서 목 놓아 외쳤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로 독재 타도!’ 최루탄 터지는 거리를 질주하며 함성을 질렀다. 시민들은 때로는 대열에 합류했고, 때로는 창문을 열고 박수를 쳤다. 지나는 택시들은 경적을 울려 호응했고 가게 아주머니는 시원한 물을 나누어주었다. 그해 6월은 뜨거웠지만 아름다웠다. 1987년 6월, 벌써 21년 전 일이다. 그때 대학생과 시민들의 함성은 무쇠가 되어 전두환 군사 정권의 정수리를 쳤다. 대통령 직선제는 그렇게 피로 싸워 얻은 결과물이었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뜨겁기는 올해 6월도 그해 6월에 뒤지지 않는다. 서울광장을 달구는 촛불은 무언의 함성이다.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몸부림이다. 국민을 우습게 보는 정권을 향해 내리치는 죽비다. 애초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타올랐던 ‘촛불’은 일반 주부·회사원들로 번져가더니 대학생을 넘어 종교인, 교수 등 사회 지도층까지 흔들고 있다. 올해 6월, 촛불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국민을 거리로 나서게 만든 ‘불신 정권’

정권이 다섯 번이나 뒤바뀐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의 6월과 2008년의 6월은 닮았다. 국민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서부터 그렇다. 현 정권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크다. 국가 운영을 맡겨놓은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켜도록 만들었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은 그해 초 발생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하려 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얼토당토 않는 해명은 국민을 분노하게 했다. 진실이 하나둘 드러나자 뒤늦게 문책 인사를 단행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부도덕한 정권을, 국민은 용서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또 4·13 호헌 조치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바라는 국민의 요구를 묵살했다. 개헌에 대한 논의조차 할 수 없도록 입을 틀어막자 국민의 분노는 더욱 커졌고 시위 규모도 시간이 흐를수록 확대되어 갔다. ‘직접 대통령을 뽑겠다’는 국민의 열망은 군사 정권의 강압으로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미국 정부와의 쇠고기 수입 협상에서 국민을 따돌렸다. 협상 과정과 내용에 갖가지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문제 없다”라는 무책임한 답변만 늘어놓았다. 특히 국민의 건강과 직결된 광우병 위험에 대한 초기 대응은 공분을 살 만큼 안일했다는 지적이 많다. 뒤늦게 대책안 마련에 부산하지만 한 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5월29일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의 고시 강행은 활활 타오르던 촛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5월31일 전국적으로 10만여 명이 모여 ‘고시 철회’를 요구하는 대규모 촛불 집회가 열렸다.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도 우려를 표시하자 정부는 마지막 절차인 관보 게재를 유보했고, 미국산 쇠고기의 검역 재개는 일단 뒤로 미루어졌다.

▲ 2008년 6월의 광장에는 ‘넥타이 부대’에 이어 ‘유모차 부대’도 등장했다. 데이트 중인 연인들의 모습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시사저널 황문성

‘불순 세력 배후설’ 제기하기 바쁜 정권

국민의 목소리를 너무 가볍게 여겼다.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일부 과격분자, 멋모르고 날뛰는 일부 청소년쯤으로 치부했다. 전두환 정권은 6·10 민주항쟁을 이틀 앞둔 6월8일 담화문을 통해 ‘불법 집회’ ‘집단 난동’ 운운하며 “엄정하게 처단할 방침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안정을 희구하는 절대 다수 국민의 여망에 따라 마땅히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또, 반국가적·반사회적 책동을 주도해온 ‘불순 좌경 세력’을 배후로 지목했다.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이명박 정부가 촛불 집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는 수사 당국 수장들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김경한 법무부장관은 5월26일 “불법 집회는 법에 따라 주동자는 물론 선동·배후 조정한 사람까지 끝까지 검거해 엄정히 처리하라”라고 지시했다. 어청수 경찰청장도 같은 날 기자간담회에서 “지난해에도 시위했던 사람들이 많이 리드한 것 같다”라며 배후설을 제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 발짝 더 나가 촛불 집회 상황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1만명의 양초는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라고 지시해 빈축을 샀다. 이후 모금 운동으로 마련한 시위대 간식용 김밥에 ‘우리가 여러분의 배후 세력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스티커가 붙을 만큼 ‘배후설’은 광장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넥타이 부대’ 뒤이은 ‘유모차 부대’ 등장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다양하게 모였다. 1987년 6월29일 집권여당인 민정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대표가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항복 선언’을 한 것은 국민으로부터 고립된 정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넥타이 부대’로 불린 직장인들을 포함한 일반 시민들의 집회 참여가 늘어나자 더 이상 ‘불순좌경 세력의 선동’이라고 눈가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6월 민주항쟁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2008년 6월의 광장에도 ‘넥타이 부대’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퇴근 후 곧장 달려와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은 불편한 복장이지만 시청 앞 광장에서 내지르는 함성은 21년 전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아이와 함께 집회에 참석한 ‘유모차 부대’도 등장했다. 아이의 건강을 지키겠다는 모정(母情)은 배후 세력 운운하는 정부를 무색하게 만든다. 온 가족이 함께 광장을 찾은 이들도 적지 않다. 노현광씨(44)는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이에게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나왔다.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 1987년 6월은 뜨거웠고 험난했다. 전두환 군사 정권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뉴시스

공권력 앞에서 당당한 시민들

태극기와 애국가는 21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광장을 하나로 만든다. 1987년 6월 시위대 선봉에서 대로를 가로지르던 초대형 태극기는, 2008년 6월 한 손에는 촛불을 다른 한 손에는 팻말을 움켜쥔 20대 청년의 가슴으로 옮겨졌다. 1987년 6월 한 시위 참가자가 태극기를 몸에 두른 채 도로 한복판을 질주하던 감격스런 장면은 2008년 6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애국가의 물결도 흘러넘친다. 1987년 비장하고 엄숙하게 불렀던 애국가는 흥겹고 발랄하게 변주되어 광장에 울려 퍼진다.

태극기와 애국가에서 보여지듯 2008년 6월은, 1987년의 6월과는 같으면서 또 다르다. 촛불 집회는 6월 항쟁이 가져다준 절차적 민주주의를 토양 삼아 지난 21년 간 키워온 시민주권의식의 발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1조 조문은 더 이상 형식적 조문에 그치지 않는다. 집회 참가자들은 누구나 ‘헌법 1조’ 노래를 합창하며 ‘권력자’로서 요구할 것은 요구한다.

더 이상 공권력에 쫓기어 도망가지 않는다. 화염병도 쇠파이프도 없지만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물대포를 맞으면 “물 절약” “세탁비”를 외치며 맞서고 ‘닭장차’에 태우려 하면 “잠깐만요” 하고는 그 앞에서 기념 사진부터 찍는다. 진입을 막기 위해 세워둔 경찰 버스 창문에 ‘불법 주차’라고 쓰여진 딱지가 덕지덕지 붙을 정도로 공권력 앞에서 당당하다. 오히려 전경들을 설득하기도 한다. 촛불 집회에 두 번째 나왔다는 장대수씨(62)는 “전경들한테 ‘광우병 문제 있지 않느냐, 우리가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계속 설득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모두가 주인공인 ‘축제의 장’

이러한 당당함은 촛불 집회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다. 2002년 월드컵 응원 당시를 연상시키는 경쾌함이 광장 곳곳에 배여 있다. 집회 현장에서 데이트 중인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4·19부터 5·18, 6·10 민주항쟁을 모두 경험했다는 박정수씨(71)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도망가기 바빴는데 지금은 맨 앞에 떡하니 앉아서 노래 부르고 이야기 듣고 웃고 있으니 얼마나 격세지감인가. 시민들이 집회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집회가 자율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은 또 다른 측면에서 진화의 징표다. 총괄 지휘하는 지도부가 없거니와 있다한들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는 애당초 먹혀들지 않는 구조다. 몇몇 운동 조직이 선두 지휘에 나섰다가 면박만 당한 채 뒤로 물러섰다. 1천여 개의 시민사회 단체와 인터넷 모임 대표들이 결성한 광우병국민대책회의도 결정해야 할 사안이 생기면 참가한 시민들의 의견을 물어 결정한다. 집회 도중 자리를 떴다가 다시 찾는 참가자도 허다하다. 강제로 부르지도 잡지도 않는다.

서로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만큼 공동체적 가치도 존중된다. 관리·감독을 하지 않으면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 이유다. 일부 경찰을 자극하는 무분별한 행동이 보이면 “비폭력” 구호를 합창하며 서로를 통제한다. 마무리 집회가 끝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주변을 청소한다. 다음번 집회에 참가할지 여부는 온전히 본인이 결정할 사안이다.

 

 다양한 의제 공론화, 실질적 성과 거둘까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지만 그 열매는 정치인들이 가져갔다.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분열된 민주 세력은 그해 12월 대선에서 패배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해 6월은 민주화의 시발이었지 완결은 아니었다.

2008년 6월 촛불 집회는 그래서 더욱 주목된다. 참가자들은 정치권에 큰 기대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정부·여당은 물론 야당 의원들도 집회를 주도하지 못한다. 제1 야당인 통합민주당 의원들의 경우 “그동안 뭘 했느냐”라는 식의 핀잔을 듣기도 한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등 진보 진영 정치인들도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 역시 한 명의 시민일 뿐이다.

집회에서 논의되는 의제도 다양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 모였지만 중·고생들은 “0교시 수업 반대”, 대학생들은 “등록금 인하”, 주부들은 “서민 물가 안정” 등 삶에서 절실히 느껴온 문제를 현장에서 공론화하고 있다. 인터넷 토론방은 또 다른 집회 현장이다. 이는 제도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넘어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자생적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진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이 일괄 사퇴를 표명하면서 물꼬가 트였지만 실질적인 성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촛불 집회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어느정도 변화의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인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2008년 광장을 달군 촛불이 군사독재 정권을 굴복시켰던 1987년 6월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조·중·동’ ‘대통령’ ‘정치인’ ‘경찰’로 상징되는 기존 권위는 대중들의 조롱감이 되었다. 조직적 행태에 익숙한 이른바 ‘운동 조직’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주인은 오로지 ‘국민’이었다.

이번 경험을 통해 한국 사회는 수직적이기보다는 수평적인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한 단계 높은 민주 사회로 가는 길을 걷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나 행정 또한 거대 담론이나 권위적인 질서보다는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유연함을 갖추는 쪽으로 변화하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또한 국민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위정자는 예외 없이 국민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소중한 교훈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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