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ᆞ일본 사이 정처 잃은 국보 284호 초조본 대반야경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8.06.0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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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안국사측, 초조본 대반야경 도난 주장/양국 소유권 분쟁 조짐…추가 국보 지정 연기/유상옥 코리아나 회장의 매입 배경도 주목
▲ 초조대장경본을 소유하고 있는 유상옥 코리아나 회장이 화장품미술관에서 백남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보 제284호인 초조본 대반야경(이하 초조대장경본)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이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 지난 1997년 일본 사찰인 안국사(安國寺)에서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조대장경본 일부가 우리나라 국보로 등록된 것이 화근이다. 일본 외무성까지 나서 초조대장경본이 한국으로 건너가게 된 경위를 밝혀내라며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있어 자칫 외교 분쟁으로 비화될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2년(1011년)에 제작된 것으로 해인사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고종 19년(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 목판이 대부분 불에 탔고, 현재는 판본 일부가 민간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가운데 6백권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그동안 안국사에서 보관해왔다. 일본 정부는 지난 1975년 초조대장경본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해 국보처럼 관리하고 있다.

일본은 총 6백권의 초조본 중에서 5백여 권이 지난 1990년대 초 한국으로 밀반입되었고, 지난 1997년에는 권제 162, 170, 463 등 세 권이 문화재청에 의해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 권의 국보는 현재 유상옥 코리아나 회장이 소유하고 있다.

▲ 일본 안국사. ⓒ연합뉴스

일본 외무성, 우리 정부에 진상 조사 요구
일본 안국사측에서는 도난당한 문화재가 우리나라에서 감쪽같이 국보로 변신했다며 현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상태라고 한다.

소유자인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은 이런 상황 변화에 당혹해하고 있다. 유회장은 재계에서 소문난 문화재 수집광으로 통한다. 지난 30여 년간 모은 각종 유물만 1만여 점에 달한다. 지난 2003년에는 그동안 모은 유물로 코리아나 박물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비싼 가격에 사들인 국보가 도난당한 일본 문화재라는 구설에 오르자 난감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회장측은 현재 “도난품인지 몰랐다”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코리아나 박물관의 한 관계자는 “(유회장이) 초조대장경본을 구입한 시점은 이미 국보로 지정된 다음이었다. 판매자를 믿고 구입했는데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보 지정 배경이나 유회장의 매입 루트가 투명하지 않아 일본측에 공격의 빌미를 주고 있다. 미술평론가 김호년씨는 “초조대장경본은 지난 1990년대 대구의 유물 수집상인 조 아무개씨에 의해 처음 국내에 유통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씨가 타계해 정확한 매입 루트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사정이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가자 문화재청은 나머지 초조대장경본에 대한 국보 지정을 무기한 연기했다. 문화재 자체는 같은 것인데, 어느 것은 국보로 지정이 되고 어느 것은 되지 않는 묘한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미술평론가 김호년씨는 “논란이 거세지자 문화재청이 초조대장경본에 대한 추가 국보 지정을 미룬 것으로 알고 있다. 이로 인해 형평성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측은 “심사가 까다로워졌기 때문이지 국보 지정을 미룬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박수희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학예연구사는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해도 문제의 소지가 있을 경우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국보 지정을 위한 심사를 하면서 매입 경위 등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지 여부만을 따졌다. 그러나 최근 관련 규정이 강화되면서 심사 과정 또한 엄격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국립박물관과 같은 국가 기관의 경우 문화재청에 직접 국보 신청을 할 수 있지만 개인은 지자체를 거쳐야 한다. 지자체에서 막는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미술계 안팎에서는 문화재청이 한·일 간의 미묘한 관계를 의식해 추가로 국보 지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일본측의 항의가 예사롭지 않자 외교적 마찰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해 사전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우리 외교부에 공식적인 진상 조사를 요청했다. 일본 언론들도 “안국사에서 도난당한 보물이 한국에서 국보가 되어 있다”라는 내용의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일본 네티즌들은 관련 사이트를 통해 비난 공세를 펼치고 있다. 한 네티즌은 “한국은 일본이 강탈해간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요구해왔다. 그렇다면 일본이 도둑맞은 초조대장경부터 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나서기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초조대장경 대부분이 개인 소장품이어서 국가가 개입해 조사할 명문이 없다는 것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일본측에서는 도난을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문화재도 소유자가 개인이기 때문에 조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련 당국이 일본에 그런 어려움을 통보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 한국 고려대장경연구소 연구원들이 일본 교토 소재 남선사가 소장한 초조대장경 인본 불경류를 일본측과 공동 조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화재 거래 투명성 높이는 방안 마련 시급
일각에서는 유상옥 회장이 초조대장경본을 보유하게 된 배경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문화재 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출처가 불분명한 국보급 문화재가 ‘선의취득’이라는 이유로 법망을 피해 아무런 제재 없이 거래되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만큼 이를 명확히 가려낼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손봉숙 전 통합민주당 의원은 “문화재는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소유하고 있고, 소장 경위 또한 뚜렷하지 않다. 문화재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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