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에 덴 한나라당, ‘웰빙’ 잠 깨려나
  • 김영화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08.06.1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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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 정국에 오판ᆞ안이 드러내 ‘자살골’…홍준표ᆞ임태희 라인업 들어서며 뒤늦게 변화 바람

▲ 지난 6월9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 참석한 강재섭 당대표, 홍준표 원내대표, 임태희 정책위원장(앞줄 오른쪽부터) ⓒ연합뉴스
거리에 밤마다 촛불이 넘쳐날수록 한나라당의 ‘우울 모드’는 점점 더 깊어가고 있다. 촛불 집회가 벌써 40일을 넘어섰다. 지난해 12월 정권 교체에 열광했던 지지자들은 이제 집권 여당과 이명박 대통령을 술자리의 안주로 삼고 있다.

10년 만의 여당 복귀에 들떠 있던 당직자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6월10일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뒤 탈당했던 친박 의원들의 복당이 허용되어 의석 수가 1백53석에서 1백64석으로 늘게 되었는데도 기뻐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쇠고기 문제로 정국이 반전된 이후 당 회의 석상, 논평, 브리핑 등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는 ‘자숙’ ‘쇄신’ ‘반성’이었다. 그만큼 한나라당은 무기력했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한나라당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정몽준 최고위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위기에 대해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자책골로 전반전 시작하자마자 한 골 먹은 것이다”라고 비유했다. 정최고위원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 이 말은 한나라당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쇠고기 정국 초기에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첫 단추를 완전히 잘못 끼우는 우를 범했다. 5월2일 열린 한나라당 주요 당직자회의는 난데없이 MBC <PD수첩> 성토장으로 변했다. 바로 사흘 전 전파를 탄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위험 논란’ 편이 광우병 괴담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더 직접적인 배경은 이날 아침 정례 회동을 가진 이명박 대통령과 강재섭 대표가 시중에 퍼진 광우병 괴담에 우려를 표명한 것이었다.


‘노른자위’ 국회직ᆞ상임위에만 군침

이날을 계기로 한나라당은 급속하게 정권의 선전 나팔로 전락했다. 이날 회의를 주재한 안상수 원내대표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면 광우병이 확산될 것이라는 주장은 정확하지 않은 논거를 바탕으로 거의 선동에 가까운 것이며 국민을 정신적 공황 상태로 몰고 갈 수 있다”라고 꾸짖었다. 심재철 원내부대표는 ‘혹세무민’ ‘황당무계한 이야기’ ‘명백한 텔레비전의 폭력’으로 몰아붙였다. 정부가 협상의 잘못을 인정하고 30개월 이상 된 쇠고기의 수입 금지를 천명한 지금에 와서 보면 명백한 오판이었다.

또, 한나라당은 촛불 시위의 ‘배후론’을 확산시키는 데도 일조했다. 의원들 입에서 “촛불 집회의 배후는 야당의 정치꾼이다”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왔다. 이는 가뜩이나 성마르던 민심에 불을 질렀다. 한마디로 ‘헛발질’ ‘자살골’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이뿐이 아니다. 쇠고기 청문회로 사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 드러난 뒤에도 한나라당은 시종일관 수동적으로 여론에 끌려다니는 모습이었다. 책임 있는 여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작 경찰을 향해 “강경 진압은 자제해달라”라고 당부한 것이 전부였다. 한마디로 작금의 사태에서 집권 여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원인이 있다. 먼저 청와대나 정부와 국정을 조율할 컨트롤 타워가 미비하다. 당권 교체기이다 보니 중심이 제대로 서지 않는 것이 한 이유다. 때문에 집권 100일이 넘었는데도 당 시스템은 아직 야당이다. 한 당직자는 “당이, 일이 터지면 논평 하나 내고 마는 야당 습관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더 큰 이유로는 이명박 대통령이 위기에 처했어도 당은 뒷짐 지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점이 꼽힌다. 복당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게 파인 친 박근혜계 의원들은 사실상 청와대와 소통을 끊고 있다. 총선에서 살아 돌아온 친박 의원은 30여 명이나 되지만 이들은 사실상 ‘여당 속 야당’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총선 직전 감행한 무위(無爲)의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주류측 온건파의 중재로 몇 차례 회동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양측에서 다른 얘기가 나왔다.

그렇다고 친박 의원만 탓할 것도 못 된다. 어찌 보면 당 전체에 퍼져 있는 ‘웰빙’ 풍조가 더 근본적인 문제다. 이는 주류측인 친 이명박계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현재 당 중진들 가슴 속에는 “대통령이야 어찌 되든 나는 상관없다”라는 인식이 흐르고 있다. 이는 대통령 취임 후 불과 두 달 만에 총선이 치러진 것과 관련이 있다. 정권 초기에는 여당의 역할이 아무래도 제한되어 있다. 당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은 차기 대권 주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정권 후반기다. 이 때문에 중진들 사이에서는 “미리부터 힘을 뺄 필요가 뭐 있나. 국회의원 임기 전반부에는 경력 관리나 지역구 관리에 치중하는 것이 낫다”라는 인식이 적지 않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진들은 경력 관리를 위해 국회직 가운데 어떤 자리를 맡을까, 초·재선 의원들은 어느 상임위를 맡을까에 몰두하고 있다. 주류측의 핵심 중진인 김형오 의원(5선)과 안상수 의원(4선)이 당권에 도전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국회의장 경선에서 맞붙은 데서 이런 기류를 읽을 수 있다. 이윤성 의원(4선)이 일찌감치 국회부의장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내 쇄신파로 불리는 남경필(4선)·원희룡(3선)·정병국(3선) 의원도 쇠고기 현안에 대해 뒤늦게 몇 차례 쓴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별 차이는 없었다. 이들 역시 관심은 상임위원장 자리에 가 있다는 관측이 많다.


6월2일 국정쇄신 토론 의원총회에서부터 분위기 바뀌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5월22일 홍준표 원내대표-임태희 정책위의장을 중심으로 원내대표단이 구성되면서 당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쇠고기 여론이 민란 수준으로 악화되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측면도 있지만, 당의 신주류로 불리는 이들은 정부 정책을 일방적으로 편들어주거나 정부가 벌인 일의 뒷수습에 급급하던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게 움직였다.

원내대표단이 6월2일 기획한 국정 쇄신 토론 의원총회는 이같은 변화의 분수령이라 할 만했다. 쇠고기 수입 고시의 관보 게재를 하루 앞두고 긴급 소집된 의원총회에서는 “관보 게재를 강행할 경우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할 수 있다” “전면적인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라는 의원들의 경고가 잇따랐다. 마이크를 잡고 발언대에 선 20명의 의원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초선 의원이었다. 홍원내대표가 초선들의 입을 빌어
“재협상은 불가능하다”라고 고수하는 정부에 충격파를 던진 것이었다. 결국, 정부는 다음 날 30개월령 이상 쇠고기의 수입 중단을 밝히며 백기를 들었다.

당내에서는 홍준표-임태희 라인이 새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당이 고유가 대책 당정 협의에서 정부측 대책이 미흡하다며 한 차례 반려한 것이나,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공기업 민영화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후순위로 재조정하도록 강력히 요청한 것도 달라진 모습의 일면이다. 하지만 그동안 무기력한 여당의 모습 속에 내연해 있던 당내 계파 갈등, 웰빙 풍조 등은 새 지도부 체제에서도 쉽게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이 와중에 터진 이상득계와 정두언계의 권력 투쟁은 당의 외우내환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좀더 근원적인 당 쇄신이 필요하지만, 조기 전당대회 개최, 당 지도부 전원 사퇴 등의 제안은 힘을 얻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러다가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도 지리멸렬했던 열린우리당처럼 되는 것 아니냐”라는 세간의 입방아를 무심코 흘려들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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