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바뀌어도 권력 그대로인 ‘푸틴의 나라’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06.17 11: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 대통령 취임한 러시아에 어떤 변화 있었나

▲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앞)과 푸틴 총리(뒤)의 '관계'는 여전히 안갯속에 묻혀 있다. ⓒEPA

지난 5월7일 낮 크렘린에서 가장 큰 연회장에 블라디미르 푸틴이 입장했다. 이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신임 대통령이 들어와 푸틴 옆에 앉았다. 푸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순간부터 러시아의 최고 권력은 메드베데프에게 이양된다고 선언했다. 메드베데프는 러시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겠다고 다짐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일어서서 2천4백명의 내빈에게 인사했다. 권력 이양 절차는 그렇게 끝났다. 새 대통령의 취임을 알리는 엄숙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문은 남았다. 누가 러시아의 진짜 권력자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권력 이양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역사에서 현직 대통령이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대통령으로서의 권위와 인기가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난 대통령이 여전히 국가 최고 지도자의 지위를 누리는 것 역시 처음이다. 푸틴 대변인의 말이 걸작이다. “메드베데프가 국가 원수가 되었다고 해서 푸틴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푸틴은 총리로서 그가 지난 8년간 설정한 국정 과제를 계속 수행한다.” 그로부터 24시간 후 푸틴은 총리에 임명되었다. 푸틴이 전임 총리보다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분명해졌으나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향후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여전히 안갯속에 묻혀 있다. 달라질 것이라고는 그가 좀더 부드러운 얼굴로 서방 수뇌들 앞에 나타난다는 사실뿐이다.

서방의 분석가들은 푸틴과 메드베데프가 벌일 권력 암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무덤덤했다. 푸틴의 호칭이 대통령에서 총리로 바뀌든 말든 푸틴을 여전히 실권자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국민은 거의 체념하고 있는 듯하다. 메드베데프는 계속해서 푸틴의 충복으로 남을 것이고, 모든 각료 임명도 푸틴의 지시에 따라 푸틴의 사람들로 메워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예상은 메드베데프의 첫 외국 순방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지난 6월5일 독일을 방문한 그는 메르켈 총리와 회담했다. 장시간의 회담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푸틴이 앞서 거론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유럽과 미국에 많은 것을 요구하라고 주장했다. 메드베데프의 말투는 푸틴보다 부드러웠으나 그 내용은 그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푸틴의 목소리였다. 독일-러시아 경제포럼에서도 그랬다.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아를 나토에 가입시키려는 유럽의 계획에 단호히 반대했다. 푸틴이 하던 대로였다. 다만 KGB 출신인 푸틴과는 달리 변호사 출신인 메드베데프와 메르켈 총리가 훨씬 부드러운 인간적 관계를 보인 것이 달랐다. 과거 메르켈이 푸틴과 만날 때 보였던 긴장은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르 몽드, 푸틴-사르코지 회담 두고 “푸틴이 러시아의 실권자 확인” 논평

6월7일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날 국제 행사의 사회자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푸틴의 이름을 부르는 실수를 했다. 사회자는 “블라디미르”까지 꺼냈다가 얼른 말을 중단하고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라고 정정했다. 메드베데프는 사회자의 실수를 알고도 모른 척했다. 누가 러시아를 통치하는가에 관한 끝없는 논쟁의 와중에서 발생한 조그만 소동이었다.

▲ 5월29일 프랑스를 방문한 푸틴 총리(오른쪽)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ITAR-TASS
푸틴의 권력은 대통력직에서 물러난 뒤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과거 스탈린 시절에 스탈린이 싫어하는 인물들의 사진은 정부 청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스탈린 사진만 남았다. 지금 크렘린에 관한 언론 보도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푸틴에게 비판적인 뉴스나 논평이 서서히 삭제된다. 보도만 누락되는 것이 아니라 푸틴을 비판하는 언론인들도 현직에서 사라지고 있다. 뉴욕 타임스에 의하면 푸틴과 메드베데프는 상호 합의 하에 언론 장악을 시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최근 연설에서 러시아의 우선 과제는 언론 자유가 아니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푸틴이 처음 대통령에 선출된 2000년 이후 러시아에서는 14명의 중립적 언론사 기자들이 원인 모르게 피살되었다. 3개 신문사는 문을 닫았다. 그동안 통제가 어려웠던 인터넷 매체에 대한 검열도 심해지고 있다. 하도 간섭이 심하니까 일부 언론인들은 ‘자가 검열’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TV 방송에 근무하는 기자들 간에 이런 현상이 심하다.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체첸·그루지아·이란 등에 관한 뉴스는 정부 지침을 철저히 따른다. 푸틴의 총리 취임과 함께 언론 통제가 가혹해지는 것이 묘한 여운을 풍긴다. 말하자면 총리인 푸틴이 대통령 행세를 하고 있다는 시중의 쑥덕공론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옛 소련 시절 ‘뉴스’는 정부 발표를 의미했다. 러시아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미국 언론이 이런 현상을 비판해도 러시아 시청자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미국식 프로파간다라는 것이다.

푸틴의 권력 게임 효과는 6월 초 그의 유럽 방문 때 극적으로 나타났다. 푸틴이 프랑스를 방문하고 간 직후 부시 대통령이 왔다. 두 지도자를 맞이하는 프랑스의 태도는 지난 8년간 푸틴과 부시의 대결이 푸틴의 승리로 끝났음을 보여주었다. 푸틴은 그동안 러시아를 번영하는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풍부한 천연 가스와 석유 자원을 활용해 러시아를 부국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 공급원으로서의 위상을 한껏 이용해 유럽연합에 대한 영향력까지 강화했다. 반면, 유럽에 대한 부시의 영향력은 거의 소멸했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졌고 관타나모와 아부그라이브 감옥에서의 고문 스캔들은 미국의 이미지를 훼손했다. 유럽은 부시보다는 푸틴의 일거수일투족에 귀를 기울인다. 비록 임기가 1년밖에 남지 않았다고는 하나 대통령인 부시보다 총리가 된 푸틴을 더 환대하는 유럽의 처사가 야속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부시는 유럽 5개국을 1주일간 방문하는 동안 가는 곳마다 푸대접을 받았다.

유럽은 강력한 동맹으로서 미국이 늘 필요하다고 되풀이해 말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말이 옛 노래가 되었다. 푸틴은 유럽에 나토를 확대하지 말고 코소보를 독립시키지 말라고 경고한다. 유럽은 이를 무시할 수 없다. 유럽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고 있는 러시아 석유회사 가즈프롬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푸틴과 사르코지 대통령의 회담을 두고 푸틴이 여전히 러시아의 실권자임이 확인되었다고 논평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부시는 유럽이 필요한 것을 줄 능력이 거의 없다. 푸틴과의 대결에서 부시는 2006년 페테르부르크 G-8 정상회담 때부터 수세에 몰렸다. 역시 러시아에 대한 유럽의 에너지 의존 때문이었다. 2년 후 유럽은 러시아와 에너지 분야의 전략적 제휴를 맺을 때 부시의 도움을 얻지 못했다.

푸틴은 르 몽드와의 회견에서 부시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란의 핵 개발 저지를 도와달라는 부시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이란은 핵보유를 원하지 않는데 무슨 소리냐고 핀잔을 주었다. 이란 문제에서 푸틴의 협조를 기대하고 푸틴과의 대결을 피했던 부시의 판단은 빗나갔다. 푸틴은 부시를 함부로 다루어도 반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시까지 농락하는 푸틴의 자신감은 국내에서 그가 권력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 달 후 부시는 일본에서 열리는 G-8 정상회담에서 메드베데프를 만난다. 그때 러시아 대통령은 푸틴의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할 것이고, 부시는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를 낼 것이다. 푸틴은 일본에 오지 않고도 메드베데프를 통해 부시를 요리할 만큼 마음껏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