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목숨, 기적 같은 삶
  • 이재현 (yjh9208@sisapress.co)
  • 승인 2008.07.0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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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 없는 남자와 말 못하는 여자의 애달픈 ‘사랑’


만화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사람이 많듯 영화도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사람이 많다. 지난 호에 소개한 영화 <핸콕>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다. 주정뱅이가 가공할 속도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악당들을 물리치니 내가 핸콕이 된 것처럼 속이 후련하다. 이런 영화들은 다 해피엔딩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관객들은, 특히 여자들은 슬픈 영화도 마다하지 않는다.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같이 울고 같이 죽으며 극장 문을 나서는 것이다. 영화 <궤도>는 슬프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영화다. 독립영화이니 애초부터 재미는 기대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궤도>는 우리에게 산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영화다.

슬프지도 않고 재미도 없지만…

<궤도>의 태생은 연변이다. 영화의 주인공 철수(최금호 분)는 실존 인물로 연변TV 방송국이 방송한 다큐멘터리 <금호의 삶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는 두 팔이 없는 장애자로 두 발로 모든 것을 해결 해야 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연변TV PD 출신인 김광호 감독은 이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궤도>를 구상했다고 말한다. “6개월 동안 최금호씨 집에서 먹고 잤다. 그 집에서 시나리오를 썼다.” 김감독의 말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시점 숏’으로 촬영했다. 배우의 눈이 곧 카메라 렌즈여서 스크린을 보는 관객들은 답답하다.

두 팔이 없는 철수는 마을 동구 밖에서 혼자 산다. 마을 사람들은 가끔 그를 구경하는 것으로 그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의 생계수단은 약초를 캐서 내다파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 치고 비 오는데 그의 집 창밖에 웬 여자가 서 있다. 향숙(장소연 분)은 비를 흠뻑 맞은 채 갈 곳이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철수는 말없이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때부터 향숙은 철수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한다. 철수가 약초를 캐러 가면 향숙은 집에서 빨래를 하고 밥도 짓는다. 향숙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한다. 이 기묘한 동거는 영화 내내 계속된다. 1시간30분이 넘는 상영 시간이지만 영화는 대사가 없다. 시점 숏이니 철수가 나오면 향숙이 안 보이고, 향숙이 나오면 철수가 안보인다. 그가 그녀를,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둘의 관계는 아주 느릿느릿 진전된다. 말은 못하지만 사내와 사는 처녀, 두 팔은 없지만 처녀와 사는 남자. 이 노릇을 어찌하랴. 관객들은 울고 싶을지경이다.

최근에 본 독립영화 중 가장 잘 만들었다. 일반 상영관에 걸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 시중 영화관에는 <핸콕>이 걸려 있고, <원티드> <강철중>이 버티고 있다. 독립영화 마니아들만 보라는 것인가. 그러기에는 철수의 삶과 사랑이 너무 안쓰럽다. 7월1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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