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기밀이 봉하마을로 간 사연
  • 전남식 편집국장 (niceshot@sisapress.com)
  • 승인 2008.07.15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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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미국 대통령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고 한동안 의회와 법정투쟁을 벌였다. 자신이 재임 기간 남겼던 기록물이 의원들에게 넘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닉슨은 대통령의 프라이버시도 보호해야 한다며 당시 의회가 제정한 ‘대통령 기록물 보존법’의 위헌성을 지적했다. 법원은 닉슨의 주장을 일축했다. 의회는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모의하며 닉슨과 참모들이 주고받았던 세세한 대화 내용이 담긴 ‘백악관 특별 파일’을 낱낱이 풀어헤쳐 사건의 전모를 온 국민에게 알렸다. 닉슨은 ‘거짓말하는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쓴 채 물러나고도 또다시 여론의 몰매를 맞는 고초를 당해야 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재직 시절 업무와 관련된 공문서는 물론 사신(私信)까지 기록해 보관했다가 국가에 기증하는 것을 관례처럼 여기고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통령의 기록은 국민의 기록이다”라고 했다. 미국 법원이 닉슨의 사적 이해를 무시한 것은 이런 전통에 따라 대통령의 기록이 무엇이든 국민의 이해에 우선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들도 닉슨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퇴임 후 적지 않은 곤욕을 치렀다. 재직 기간 남긴 기록들이 훗날 터져나와 자신 또는 핵심 측근들이 여론 재판을 받거나 사법 처리까지 되는 등 ‘죽은 권력’의 비애를 절감해야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북풍 사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북 송금 사건으로 험한 꼴을 당했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직접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기록물이 국가 소유라고 해도 보호할 것은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살아 있는 권력’의 정략에 따라 가리지 않고 까발려졌다. 그렇다 보니 전직 대통령이면 누구나 기록물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는 것이 당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신의 기록물이 현 정권의 수중에 있는 게 꺼림칙했을 것이다. 청와대 컴퓨터 메일 서버를 통째로 가져갔든 사본을 가져갔든 그 동기는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도가 지나쳤다.

만일 청와대에 사소한 내용의 문건만 남기고 2백만건이 넘는 자료를 몽땅 봉하마을로 가져간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국기를 흔드는 중대한 범죄다. 더구나 가져간 기록물 가운데 ‘패트리엇 미사일 도입’ ‘한·미 관계 미래 비전 검토’ ‘북핵 상황 평가 및 대책’ 등 같은 국가 안보 대외비가 있다면 예사롭게 넘겨서는 안 된다. 전직 대통령이 이런 기밀을 청와대에서 빼가 사저에 갖고 있다면 그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와 노 전 대통령측이 옥신각신하며 논란을 벌여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제 밥그릇도 못 챙기고 뒤늦게 법석대는 청와대는 한심하고, 모든 것이 당당한 양 강변하는 노 전 대통령측은 뻔뻔해 보인다. 검찰이 나서야 한다. 모든게 사실이라면 왜 이런 자료들을, 무엇을 하기 위해 가져갔는지 밝혀내고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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