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위’ 바뀌어도 축구공은 둥글다
  •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 ()
  • 승인 2008.07.2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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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호 비판하며 돌연 ‘총사퇴’, 무엇을 남겼나

ⓒ연합뉴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최종 예선과 베이징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기에 이영무 기술위원장을 필두로 한 기술위원회가 ‘돌연’ 일괄 사퇴했다. 지난 7월4일 이영무 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사퇴 발언은 어쩌면 동석했던 다른 기술위원들까지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영무 위원장의 사퇴 발언의 진정한 배경이 무엇이었는지는 사실 알 길이 없다. 허정무 감독과의 소통 부재 때문이 아니냐는 ‘설’도 튀어나오곤 했으나, 이 지면에서 이러한 ‘설’을 다루고픈 생각은 없다. 일단 이위원장의 ‘사퇴의 변’은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기력, 감독을 잘 보좌하지 못한 책임 등이었지만 이는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지도, 선뜻 이해가 되지도 않는 측면이 있다.

우선, 대표팀의 누군가가 당장 책임을 져야만 할 정도의 치명적 상황이라면 축구에서 그 책임의 일차적 소재는 ‘감독’에게 있고, 따라서 감독이 먼저 책임을 진 후 기술위원회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상, 지금은 이 정도 수준의 사태가 발생해야 하는 시점은 아니다. 대표팀이 불만족스러운 경기력-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을 펼쳐왔던 것은 틀림이 없지만, 엄청나게 큰 우여곡절 없이 최종 예선 진출을 이룬 상황에서 감독이 물러난다면 그것이 더욱 예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회택 신임 위원장에게도 우려 많아

이어지는 맥락에서, 사퇴 직전 벌어졌던 일련의 과정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술위원회가 방송 카메라 앞에서 허정무호를 비판했던 것이 바로 지난 6월26일의 일이다. 사실 그날의 공개적 비판은 그 자체로 선수단, 코칭스태프와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로서의 기술위원회가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평상시 대표팀과 밀착해 비판적 조언을 아끼지말아야 하는 것이 오히려 기술위원회의 존재 의의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일이 있은 직후 남아공월드컵 최종 예선 조 추첨이 벌어졌고 여기서 우리는 외견상 매우 험난한 조(한국, 사우디, 이란, 아랍에미리트, 북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바로 며칠 후 기술위원회가 총사퇴를 했다. 짧은 기간 동안 펼쳐진 이 일련의 모습들은 한마디로 ‘책임 전가’의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하다. 앞에서 했던 이야기-기술위원회가 총사퇴해야만 하는 시점은 아니라는-와는 다소간 모순되게도, 기술위원회가 책임을 져야 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이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태도’였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공석이 된 기술위원장직은 지난 7월7일 이회택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넘겨받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신임 이회택 위원장은 곧바로 K리그 현장에서 활약하는 인물들 위주로 ‘실용주의 노선’의 새 기술위원회를 구성했다. 축구사의 거목들 중 한 명인 이위원장이 카리스마와 리더십, 의사 소통 등의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인 까닭에 더 힘 있고 효율적인 기술위원회를 이끌어줄 거라는 기대감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이회택 위원장의 선임 또한 수많은 축구팬의 의구심과 우려의 목소리를 떨쳐내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연합뉴스

우선, 이회택 위원장의 취임 일성 가운데 하나가 ‘대표팀 조기 소집 필요성’에 대한 것이었다는 점이 그리 반갑지 않다. 물론 여전히 창조적이지도 기술적이지도 않은 우리 대표팀이 국제 무대에서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적절한 체력의 비축 및 조직력의 극대화가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기존의 일정과 원칙에 벗어날 뿐 아니라, 국내 프로리그인 K리그의 경기력과 흥행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조기 소집 발상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특히 리그 순위 경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시기를 맞이하는 K리그 클럽들이 대표 선수 조기 소집을 수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K리그 일정에 다시 손을 대서도 안 된다.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원론적 질문은 아마도 ‘대표팀이 먼저인가? K리그가 먼저인가’일 것이다. 축구를 하는 모든 나라에서 그러하듯 대표팀과 리그는 미묘한 갈등을 낳는 관계인 동시에 불가분의 공생 관계이기도 한 까닭에, 이는 틀림없이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이에 대한 답은 명백하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논하기 이전에 ‘원칙대로 하는 것이 좋다’라는 것이다. 즉, 그 원칙이 조기 소집에 반(反)하는 것이라면 조기 소집과 같은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느 분야에서든 원칙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특히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벼락치기’ 그만하고 기본기부터 다져야

물론 이위원장이 말한 조기 소집은 우리의 옛 시절을 연상케 하는 ‘장기간의 합숙 훈련’과 같은 일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기’라고 해야 단 며칠의 문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시간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원칙이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 뒤에는 무엇이 오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더욱이 우리의 축구가 지금껏 끝없는 ‘벼락치기’에 의존해왔기에 이러한 우려는 커질 수밖에 없다. 전반적 인프라와 시스템, 선수들의 기본기를 향상시키기 위한 장기적 관점의 계획과 노력보다, 눈앞에 닥친 큰 시험에서 어떻게든 커트라인을 넘기려는 훈련에 훨씬 더 익숙해 있는 한국 축구이기에 그러하다는 이야기다. 규모가 작든 크든, 이회택 위원장은 이제 ‘벼락치기’라는 변칙적 방법론을 깡그리 잊어버려야 한다.

더불어 축구협회가 의도하는 바 축구가 ‘국민의 스포츠’인 한, 작금의 한국 축구에 대해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적어도 얼마간 귀를 열어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일련의 기술위원회 사태에서 국민이 바랐던 것은 좀더 많은 ‘개혁성’이었다. 신임 이회택 위원장이 지닌 자격, 장점들과는 별개로, 이위원장이 협회에서 장기간 일해온 인물일 뿐 아니라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 시절 이미 기술위원장을 역임했던 ‘너무 낯익은 인물’이라는 사실이 많은 팬들의 불만을 낳게 한 원동력이다. 발전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세계 축구의 흐름 속에서 이 땅의 축구협회가 지닌 마인드는 언제나 제자리걸음 중이라는 세간의 비판을 협회는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떠난 이래, 기술위원장의 자리는 단명한 대표팀 감독들의 수와 똑같은 횟수만큼 교체에 교체를 거듭해왔다. 이회택 위원장을 위시해 새로이 구성된 이번 기술위원회가 이른바 ‘죽음의 조’에서의 사투를 앞두고 있는 우리 대표팀을 위해 최선의 노력과 실질적 도움을 행사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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