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토네이도 매직’ 당신이 그리울 거야
  • 민훈기 (민기자닷컴) ()
  • 승인 2008.07.2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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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 히데오, 메이저리그에서 영욕의 세월 뒤로 하고 은퇴 양대 리그에서 한 번씩, 두 번의 노히트 노런 기록은 ‘위업’
▲ 노모 히데오가 뉴욕 양키스 팀을 상대로 공을 뿌리고 있다 ⓒAP연합

19 95년 LA 다저스에 입단하며 ‘토네이도 돌풍’을 일으켰던 노모 히데오(40)가 은퇴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묘한 아쉬움이 먼저 다가왔다. 노모는 마운드에 서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투사였다. 어떤 타자와 맞서도 물러서지 않는 투지와 함께 ‘야구 IQ’가 아주 좋았던 투수로 기억에 남아 있다. 국적을 떠나 참 좋아하는 투수가운데 하나였던 그도 결국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녹색 다이아몬드를 떠나게 되었다. 박찬호가 1996년부터 LA 다저스의 주전으로 뛰면서 계속 현장에서 취재를 하다 보니 노모를 접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당시 노모와 박찬호는 다저스 클럽하우스에서 바로 옆자리의 라커를 사용했었다.

그보다 다섯 살이 어린 박찬호는 고교 시절 노모의 독특한 투구폼을 흉내 낸 적도 있다고 했다. 포크볼이 주무기인 노모는 늘 박찬호의 패스트볼을 부러워했었다. ‘그 정도의 위력이라면 패스트볼만 계속 던져도 승리할 것’이라 것이 당시 박찬호의 강속구에 대한 노모의 평가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노모는 일본 프로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78승을 거둔 베테랑이었고,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던 가공할 포크볼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무기를 앞세워 첫해에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했고, 비록 그렉 매덕스의 부상 때문이었지만 올스타전에 선발 투수로 나가기도 했다.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한 후 노모는 영욕의 세월을 보내면서 끝없는 도전 정신을 과시했EK. LA 다저스에서 3년간 43승을 거두며 활약하던 노모는 1998년 시즌에 2승7패의 부진한 성적을 보이자 선발진에서 탈락했고,이에 발끈해 트레이드를 요청하면서 뉴욕 메츠로 옮겨 갔다.

그 후부터 노모는 무려 8팀을 전전하게 된다. 때로는 화려한 모습으로 부활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천덕꾸러기로 설움을 받기도 했다. 1999년 밀워키에서 12승8패를 기록한 노모는 다음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8승12패로부진했다. 그러나 2001년 보스턴에서 13승을 거두며 재기한 노모는 2002년 친정팀 다저스로 복귀해 2년 연속으로 16승씩을 거두며 불꽃을 태웠다. 하지만 2004년 4승11패 부진 속에 다시 다저스에서 방출된 노모는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또 한 번의 재기를 노리다가 2005년 탬파베이에서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19게임에서 5승9패를 기록한 끝에 다시 설 자리를 잃었다. 어깨 수술까지 받는 등 모두가 노모의 야구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인기가 좋던 일본에서는 여러 팀이 러브콜을 했지만 노모는 고집쟁이였다. 절대 일본 복귀는 없다던 자신의 말을 그대로 지켰다.

메이저리그 사상 5번째 업적 이루어

지난 2년간 양키스와 화이트삭스 등의 마이너리그와 윈터리그 등을 거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재기를 노리던 노모는 올 봄 스프링 캠프에서 캔자스시티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다시 한 번 빅리그에 도전장을 던졌다. 결국은 시범 경기에서 선전하며 예상을 엎고 빅리그 로스터에 들어갔지만 구원 투수로 3게임을 뛴 것 이 전부였다. 노모의 ‘토네이도 매직’은 더 이상 없었다.

이제 노모가 빅리그에서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다섯 명의 투수밖에 이루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떠났다. 노모 야구 생애의 하이라이트인 양대 리그에서 한 번씩, 두 번의 노히트 노런이 그것이다.

1996년 9월18일(이하 한국 시간) 노모는 ‘투수들의 무덤’으로 악명이 높은 덴버의 쿠어스필드에서 콜로라도 로키스의 강타선을 상대로노트 노런을 기록했다. 당시 궂은 날씨 때문에 마운드가 질척거리자 노모는 와인드업을 포기하고 셋업 포지션만으로 9이닝을 던지면서 노히트 노런의 기록을 세웠다. 여전히 쿠어스 필드 사상 유일한 노히트 경기이자 다저스 투수로는 마지막으로 이룬 위업이었다.

그리고 2001년 아메리칸리그의 보스턴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치른 데뷔전인 4월5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11개의 삼진을 잡으며 자신의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오리올스 캠덴야즈 10년 역사상 최초였고, 싸이 영·짐 버닝·놀란 라이언에 이어 역사상 네 번째로 양쪽 리그에서 각각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순간이었다(나중에 랜디 존슨이 다섯 번째로 이 엘리트 그룹에 합류했다).

▲ LA 다저스 시절 박찬호와 나란히 선 노모 히데오. ⓒ로이터

지난해 여름 뉴욕 주 쿠퍼스타운에 있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취재를 갔을 당시, 노모의 노히트 노런 공인구 두 개가 전시되어 있던 모습을 보면서 참 대단하기도 하고 또 부럽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 선수들에게 박찬호가 빅리그로 가는 문을 열어제친 것처럼 노모는 일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의 문을 연 선수였다.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하는 마쓰이 히데키는“일본 선수들이 지금처럼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게 된 것은 노모 덕분이었다”라고 말했다. 노모에 이어 일본 타자로서 첫 성공 케이스를 만든 시애틀의 이치로는 노모의 은퇴 소식에 “그가 지금까지 마운드를 지켜온 것, 그리고 은퇴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대단한 일이다. 그저 마음속으로 ‘고맙습니다’라고 전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레드삭스에서 선발 투수로 뛰는 마쓰자카는“중학 시절 메이저리그라는 명확한 목표의 길을 제시해준 분이다. 지금까지 그와 같은 필드에 서서 야구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마운드에 서왔다. 은퇴를 한다니 너무도 유감이다”라고 말했다.

내 기억 속의 노모는 참 독특한 선수였다. 늘 옅은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말은 거의 하지 않았고, 특히 마운드에 오르면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가 인상적이었다. 항상 통역을 대동했고 영어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노모는 영어를 배우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고 영어 구사력도 빵점’이라는 빈축도 들었다. 그러나 박찬호 등 동료들과는 충분히 의사 소통을 했고, 클럽하우스 직원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면 영어를 전혀 못한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에 불과했다. 그만큼 그런점에서 고집스러웠고, 또한 어설픈 영어를 하느니 공식 석상에서는 반드시 통역을 내세운 것은 이방인으로 살아남는 데 현명한 처사였다.

노모에 대한 또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일본 언론과의 껄끄러운 관계다. 일본 기자들만 나타나면 노모는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하던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노모는 일본에서 78승, 그리고 빅리그에서 1백23승 등 총 2백1승 1백55패 1세이브의 기록을 뒤로하고 야구장을 떠났다. 그러나 미·일야구계에서 그의 이름은 ‘선구자’로서 영원히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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