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철학 아시아 첫 조우
  • 김세원 편집위원 ()
  • 승인 2008.08.0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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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차 세계철학대회, 서울에서 풍성한 결실 동양 철학, 분과 학문으로 새롭게 조명
ⓒ시사저널 임영무

세계 인문학계의 최대 잔치이자 5년마다 열려 ‘철인(哲人) 올림픽’으로 불리는 제22차 세계철학대회가 풍성한 결실을 맺고서 폐막되었다. 지난 7월30일 개막되어 1주일 동안 계속된 이번 대회에는 1백4개국에서 온 2천6백여 명의 학자가 철학의 각 영역을 세분한 54개 분과, 4백78개 분임 토론에 참가해 1천3백70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오늘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Philosophy Today)’는 전체 주제 아래 이번 대회가 다룬 분야는 방대하다. ‘도덕철학, 사회철학, 정치철학을 다시 생각한다’ ‘형이상학과 미학을 다시 생각한다’ ‘인식론, 과학철학, 기술철학을 다시 생각한다’ ‘철학사와 비교철학을 다시 생각한다’ 등 4개 주제의 전체 강연, ‘갈등과 관용’ ‘세계화와 세계시민주의’ ‘생명윤리, 환경윤리, 미래세대’ ‘전통, 근대, 탈근대’ ‘한국의 철학’ 등 5개 주제로 묶인 심포지엄과 기금 강연, 초청 강연, 한국철학회 모임 등 70개가 넘는 라운드 테이블이 준비되었다. 현대철학의 모든 이슈가 원탁에 올려진 셈이다.

제자리 찾은 동양 철학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의의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창립 대회 이후 1백8년 만에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세계철학대회라는 데 있다. 지금까지 22차례의 대회 중 지역적으로 영국, 미국과 유럽을 벗어난 개최지는 멕시코시티(1963년)·모스크바(1993년)·이스탄불(2003년)뿐이었다. 서양 철학의 고향인 그리스 아테네를 제치고, 동양 철학의 선두 주자인 일본에 앞서 한국의 서울이 개최권을 따낸 데 대해 한국조직위원회 의장을 맡은 이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21세기 문명사적 전환기에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는 자리로 서울이 선택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대회를 주관한 한국조직위원회도 이번 대회 개최로 세계 철학의 변방이었던 한국이 세계 철학계로 화려하게 비상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자평했다. 대회조직위원회는 이번 행사에 북한 학자도 초청했으나 북한은 5년 전 이스탄불 대회에 이어 이번 서울대회에도 불참했다.
페테르 켐프 국제철학연맹 회장은 지난 7월30일 서울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날로 국제화되는 흐름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소통이다.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가 동서양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소통의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번 대회의 특징과 쟁점, 주요 참석자들을 짚어보았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동양 철학이 정식 분과로 편성되었으며 유학, 불교 철학, 도가 철학 등 동양 철학의 3대 분야가 세부 학문 분과로 자리 잡았다. 지금까지 서양 철학의 위세에 눌려 별도의 분과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동양 철학이 제도적 차원에서 논의되었다는 자체가 큰 의의다. 미국의 대표적 동양철학자로 서구적 가치에 맞서서 동아시아 유학을 재해석하는 ‘현대신유학’을 주창해온 두웨이밍(杜維明) 하버드-옌칭 연구소장은 “유학의 인문주의가 서구 민주주의의 함의를 풍부하게 하는 지적 자원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유교가 닫힌 개인주의를 넘어서 시민의 역동적인 정치 참여와 책임 윤리까지도 포괄하는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한국철학회 특별 세션에서는 원효·동학·퇴계·율곡·다산 등 한국 전통 철학의 성과를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20세기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1890~1981년)와 그의 제자 함석헌(1901~1989년)의 ‘씨알 사상’이 기독교적 영성과 생명 평화의 사상을 함께 담고 있는 ‘동서 문화의 만남’으로 세계 철학계에 소개되어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는 “세계 각국의 사상이 이 땅에서 만나 새로운 ‘비판적 종합’을 이루어내는 것이 한국 철학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8월3일 열린 도가철학 분과에서는 한국 선도의 독자적 정체성을 개념적으로 분석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임채우 교수의 ‘한국 선도와 한국 도교: 두 개념의 보편성과 특수성’, 중국과 한국의 오행론을 비교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정경희 교수의 ‘중국의 음양오행론과 한국선도의 삼원오행론’이 발표되었다.

▲ 맨 위부터 앨런 기바드 교수, 앨빈 골드만 교수, 김재권 교수.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 대거 참석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동양 철학이 ‘자기복제적 담론’의 틀 안에 갇혀 있는 한 발전이 불가능하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동양 철학도 국제 학계의 기준에 맞게 학설을 전달하고 토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세계 윤리학계의 대표 학자로 경제학의 게임 이론이나 진화생물학적 논의를 도입해 도덕의 기원을 밝혀내고자 하는 앨런 기바드 미국 미시간 대학 석좌교수(66), 2001년 작고한 존 롤즈와 더불어 윤리학과 정치철학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팀 스캔론 하버드 대학 철학과 석좌교수(68),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데이브 차머스 호주국립대 교수(42) 등이 참석했다. 오늘날 영·미 인식론을 대표하는 앨빈 골드만 미국 럿거스 대학 교수(70)는 인지과학·신경과학으로 심화된 인식론을 소개했다. 독일 출신으로 비서구권의 철학과 문명 간 대화의 문제에 천착해온 프레드 달마이어 미국 노터데임 대학 정치학과 석좌교수, 독일 철학계를 대표하는 비토리오 회슬러 미국 노터데임 대학 교수(48)의 발표도 이목을 끌었다. 비서구권에서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남미 해방 철학의 창시자인 엔리케 뒤셀 멕시코 메트로폴리탄 대학 교수(74), 터키의 인권운동가이자 공공윤리학자 이오아나 쿠추라디 박사(72), 중국을 대표하는 원로 철학자 탕이지에 베이징 대학 철학과 교수(81) 등이 참석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인 김재권(74·미국 브라운 대학·심리철학), 정화열(76·미국 모라비아 대학·정치철학), 조가경(81·미국 뉴욕주립대학·현상학), 이광세(74·미국 켄트 대학·철학사) 교수도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국내에서는 차인석 서울대 명예교수, 김여수 전 한국철학회장,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이태수 서울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현대 의학의 주요 이슈를 철학적 시선에서 조망하는 강연도 마련되었다. 한희진 콜레주 드 프랑스 철학 연구교수는 “히포크라테스 의학 자체가 이미 철학이며, 사회계약론의 존 로크와 실증주의의 콩트도 의사·생리학자였다”라고 말했다.

예술철학 분과에서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한풀이 춤’으로 널리 알려진 이애주 서울대 사범대 교수가 ‘춤과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전통춤이, 사유하는 생명의 몸짓, 곧 몸의 철학임을 설파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의 핵심에 섰던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자연철학과 불교철학 분과에서 과학과 불교적 세계관의 접목을 시도한 두 편의 논문(‘생물권 네트워크에서 생명의 개체 고유성’, ‘복잡계 이론과 종교적 경험에서의 완전한 깨달음 구조’)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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