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붓기냐 불끄기냐 인사가 만사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8.08.19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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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1위 KBS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차기 사장 누가 임명되느냐가 분수령
▲ 정연주 전 사장이 8월6일 KBS 회의실에서 자신의 해임을 요구하는 감사원의 발표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의 위상을 지켜온 KBS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KBS는 <시사저널>이 매년 실시하고 있는 국내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한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여론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로 그동안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켜왔다. 올해 조사에서도 KBS는 59.7%로 1위를 차지했다. 2001년 조선일보를 제치고 1위에 등극한 이래 8연패를 달성한 셈이다. 더군다나 올해는 2위 조선일보를 약 10% 포인트 가까이 멀찌감치 따돌린 독주였다. 그런 KBS가 지금 엄청난 내홍에 시달리고 있다. 정연주 전 사장이 5개월여의 ‘버티기’ 끝에 결국 해임당했고, 차기 사장 인선을 둘러싸고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KBS 내부에서는 “그동안 애써 쌓아온 공영방송으로서의 위상이 이번 파문으로 인해 다시 과거로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팽배하다.

KBS는 한동안 정권의 나팔수라는 오명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특히 5공 정권 당시 KBS ‘9시 뉴스’는 ‘땡전 뉴스’라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등 신뢰도에서 경쟁사인 MBC에 매번 밀려 왔다. 그런 KBS가 변화의 몸부림을 시작한 것은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일던 노태우 정권 때였다. 1990년 4월 노태우 정권은 새 KBS 사장으로 서기원 전 서울신문 사장을 임명했다.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였다. KBS 노조는 서사장 출근 저지 투쟁을 전개하며 강력히 항의했고, 국민의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비록 서사장의 퇴진 관철에는 실패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KBS는 ‘방송 독립’을 외치는 시금석을 확보했다는 안팎의 평가를 받고 있다.

KBS의 ㄱ팀장은 “1990년 당시 투쟁을 계기로 ‘이제 더 이상 KBS가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전체 사원들에게 확산되었다. 이때부터 사장으로 누가 새롭게 오느냐 하는 문제는 첨예한 내부 관심사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그는 본지의 이번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시사저널>의 매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언론 매체의 영향력 면에서 조선일보에 밀리던 KBS가 김대중 정권 때 박권상 사장 취임 이후 1위로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내부적으로도 KBS 방송 독립의 기틀을 마련한 최대 공로자가 박 전 사장이라는 데 대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언론으로서 영향력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인 신뢰도 조사에서 KBS는 지난해 처음 차지한 1위 자리를 올해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올해 KBS는 신뢰도 조사에서 한겨레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열독률에서도 조선일보에 이은 2위였다. 이는 정연주 전 사장의 퇴진 여부를 둘러싸고 조직 자체가 격한 내분에 휩싸였던 작금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정 전 사장의 해임 파동을 바라보는 KBS 내부의 입장은 복잡하다. 그동안 일관되게 정사장 퇴진을 주장해 왔던 KBS 노조의 입장은 특히 더 그렇다. 정 전 사장은 현재 법원에 해임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지만 그의 퇴임은 기정사실화된 상태다. 내부에서는 8월 말까지 새 사장이 임명되고, 추석 전까지 조직 전체의 정비가 끝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관심은 후임 사장의 인선에 쏠려 있다. KBS 노조는 KBS이사회가 지난 8월13일 후임 사장 임명 제청에 관한 방법과 절차를 확정하자 “낙하산 인사를 하려 한다”라고 강력히 반발하며 정사장 퇴진 반대 운동을 벌였던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이하 KBS 사원행동)측과 연대에 나섰다.

KBS 노조의 한 관계자는 “정사장 퇴진은 노조의 일관된 주장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공영방송 KBS의 위상 강화를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경찰 병력까지 회사 내에 투입시켜야 할 정도로 현 정부가 낙하산 인사 투하용으로 정사장 퇴진 카드를 내세웠음이 드러난 마당에 이를 좌시할 수는 없다. 만약 부적절한 인사가 새 사장으로 선임될 경우 현 정부는 지난 1990년 4월의 파업 사태를 훨씬 능가하는 엄청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8월13일 KBS 본관에서 임시이사회가 열리기로 예정된 가운데 장소 변경을 통보받지 못한 박동영 이사가 노조원들에 의해 가로 막혀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김인규 사장 카드 밀어붙일지에 촉각 곤두

하지만 KBS 노조의 행보를 바라보는 KBS 사원행동을 비롯한 사내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사원행동의 한 관계자는 “노조가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대안도 없이 무작정 정사장 퇴진에 현 정부와 입을 맞췄는가”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KBS 사원행동과 노조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새 단체도 생겼다. ‘KBS PD협회 정상화 협의회’와 ‘KBS 중견 기자 모임’ 등이 모여 만든 ‘KBS 정상화를 위한 사원 비상대책위원회’가 그것이다. KBS가 사분오열되고 있는 상황이다.

ㄱ팀장은 “8월 안으로 신임 사장이 선임되면 또 한 차례 큰 파고가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당초 정부에서 강력히 추진했던 ‘김인규 사장’ 카드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과는 달리 최근 흐름은 결국, 김사장 카드 관철로 가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라고 밝혔다. KBS 노조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가 내부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카드로 KBS 내부 인사를 발탁할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라며 일말의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현재 거론되는 KBS 내부 인사로는 이병순 KBS 비즈니스 사장, 이동식 부산방송총국장, 이봉희 미주한국방송 사장 등이다. KBS 출신 인사들도 궁극적으로는 내부 인사군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렇게 본다면 범위는 훨씬 더 넓어진다. KBS 제작본부장 출신인 안국정 전 SBS 부회장, <9시 뉴스> 앵커 출신인 박찬숙 전 한나라당 의원, 강동순 전 KBS 감사, 김홍 전 KBS 부사장, 보도국장 출신인 홍성규 전 TU미디어 부사장, 이민희 전 KBS 미디어 사장 등이다. KBS 이사를 지낸 김인규 전 특보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김 전 특보를 바라보는 KBS 내부의 시선은 강경하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ㄱ팀장은 “김 전 특보의 경우 회사 내 구성원들 대부분이 그를 반대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특보를 지낸 경력 때문이지, 사실 개인에 대한 큰 반감은 아닐 것이다. 일각에서는 ‘차라리 특보를 지내지 말고 그냥 교수로 남아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문제는 대통령과 가깝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입김을 차단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얼마나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김대중 정권에서의 박 전 사장과 같은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매년 본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순위 조사에서 KBS 사장은 항상 3위권 내의 높은 순위를 유지해왔다. 지금은 후보군에도 없던 인사가 KBS 사장이 갖는 위상 하나만으로도 일약 대한민국 언론계를 움직이는 ‘빅 3’에 진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KBS는 물러나는 정 전 사장의 바짓자락을 붙잡을 여유가 없어 보인다. 누가 대한민국 언론계 빅 3 인사의 새로운 주인공이 될지가 더 첨예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빅 3는커녕 KBS의 위상을 한꺼번에 허물어뜨리는 인사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라는 한 KBS 사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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