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물었던 와인이 착해졌다
  • 이 은 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08.08.19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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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화로 값 공개되자 마진 줄이며 ‘박리다매’…해외에 직접 나가 수입하며 가격 경쟁도
▲ 균일가에 와인을 파는 와인바들이 홍대입구를 중심으로 속속 생겨나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와인업계에서 거품 빼기 움직임이 활발하다. 도매보다 3~4배 많은 가격에 와인을 팔아온 호텔이나 와인바들이 마진율을 절반 가까이 줄이며 박리다매 전략으로 돌아서고 있다. 이런 변화는 와인의 대중화와 함께 수요가 매년 40%씩 증가함에 따라 생겨난 현상으로 보인다.

가장 적극적으로 변화에 대응하고 있는 곳은 웨스틴조선호텔. 지난 7월24일부터 와인 판매 가격을 10%에서 최고 50%까지 내렸다. 김제세 조선호텔 식음조리총괄담당은 “이전에는 인건비와 부대시설 유지비를 모두 제한 순수마진율이 50%에 달했다. 가격 합리화를 위해 이 비율을 20~25% 수준으로 낮췄다. 대신 판매량도 2배 가까이 올라 수익률이 감소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호텔·레스토랑이 적극적으로 가격 인하에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고객을 더 늘려보자는 것이다. 국내 와인 전체 판매량을 보면 47%를 대형 할인 마트가 차지하고 있고 호텔 점유율은 7%에 불과하다. 조선호텔의 김총괄담당은 “와인 가격에 대한 정보가 소비자들에게 많이 알려지면서 ‘호텔 와인은 거품이 심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그래서 값을 낮춰 손님을 늘리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가격을 내리자 다른 호텔에서는 ‘잠깐 저러다 말겠지’라고 넘겼는데 지금은 소리 소문 없이 다들 가격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안주 팔아서 남기는 마진이 가게 주요 수입원”

호텔측의 이런 변화에 맞춰 홍대입구의 와인바들도 마진율을 대폭 낮추고 있다. 1만5천원에 20여 종의 와인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와인뷔페에 이어 2만8천원 균일가로 50여 종의 와인을 판매하기도 한다. 와인뷔페를 운영하는 ‘바붐’의 반석 대표는 “1999년에 처음으로 와인을 팔 때에는 3배 정도 비싸게 팔았다. 그러다 대중적인 와인 가격이 공개되다 보니 업소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2배 받기도 어렵다. 와인보다는 안주를 팔아서 남기는 마진이 가게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최초로 균일가를 도입한 ‘부숑’ 강경선 대표는 “프랑스에 유학을 갔을 때 4천~5천원짜리 와인을 즐겨 마셨다. 한국에 와서 보니 와인 하나 마시려면 5만원도 훨씬 넘더라. 하루에 5병만 팔아도 그날 장사는 접어도 될 만큼 마진율이 높았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순수 마진율을 20% 이하로 낮춰 2만8천원 균일가로 와인을 팔다 보니 주말에는 50병 정도가 판매된다. 영업 전략을 박리다매 구조로 바꿔가고 있다”라고 밝혔다. 홍대입구의 이런 변화는 강남으로도 이어져 강남역 주변을 중심으로 중저가 와인을 판매하는 와인바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형 할인 마트도 예외가 아니다.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했던 만큼 마진율이 중·저가는 20%, 고가는 5~10% 정도에 불과해 가격을 더 낮출 수는 없었다. 대안으로 직접 해외에 나가 실력 있는 소규모 와이너리(양조장)를 찾아 개발함으로써 수입 원가를 낮추는 전략을 택했다. 지난해 이마트 최고 히트 상품인 조세피나가 그러한 사례다.

이마트 가공팀 심근중 바이어는 “이미 수입사들이 수입하고 있는 상품에 손을 대면 마찰이 생긴다. 그래서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상품을 찾아내 계약을 맺는 방법을 택했다. 칠레에서 유명한 와이너리가 아닌 소규모의 와이너리에서 생산되던 조세피나를 찾아 직접 계약한 결과 7천9백원으로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조세피나의 인기는 올해에도 이어져 1월부터 5개월간 매출액이 소주 매출 총액을 넘어서기까지 했다.

▲ 만화 의 출간과 함께 와인 붐이 일면서 와인 시장이 해마다 40%씩 성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입사들 난립해 3년 안에 정리될 듯

주류법에 겸업 금지 조항이 있어 판매사 단독으로는 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 때문에 수입사들은 운송비를 제외하고 5%의 마진만 남기고 수입 대행을 해주고 있다. 수입사와 판매사가 상생하는 구조를 형성해 와인 시장을 키우는 것이 매출 상승에 더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세제 개편과 함께 수입사들의 대형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더 이상의 가격 인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소매업자들의 지적이다. 더군다나 유로화 환율 상승과 고유가로 인해 와인 가격 인상 압박은 오히려 더 거세지고 있는 실정이다. 수입사인 두산주류BG는 4년 만에 유럽산 와인 가격을 12% 정도 올렸다. 롯데아사히주류에서도 올초부터 끊임없이 가격 인상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부숑’ 강대표도 “직거래하는 수입사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하반기에는 가격을 올릴 계획이라고 알려왔다. 마진율을 더 낮추거나 판매가 급증해야 현재의 균일가를 유지할 수 있다”라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와인 가격을 낮추기 위한 대안으로 수입사 통·폐합이 거론되고 있다. 롯데아사히주류 이향림 과장은 “지난해 최고점을 찍으며 수입사가 4백개를 넘어섰다. 영세한 수입사가 난립한 탓에 유통 제반 비용이 많이 든다. 이를 상쇄하려다 보니 마진율을 40~50% 정도로 높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 대형 수입사를 중심으로 통·폐합이 이루어져야 창고비나 물류비 등을 절감해 마진율을 낮출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LG와 SK가 새롭게 수입 시장에 뛰어들었다. 선발 주자인 두산과 동원, 매일유업 등은 기존의 유통망을 활용해 원가 절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과장은 “향후 3년 안에 수입사가 100개 수준으로 정리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수입사들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더불어 세제 개편에 대한 목소리 또한 높다. 현지 구매액에 관세와 주세, 교육세, 부가가치세까지 더해지다 보니 와인은 시중에서 원가보다 70% 정도 비싼 상태에서 유통되고 있다. 복잡한 세제가 와인의 거품을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기획재정부 국제조세제도과 이승희 실무관은 “주류는 일반 공산품과 달리 음주 사고, 의료비 등 사회적 비용을 유발시킨다. 사용자 부담 원칙에 따라 세금을 많이 붙일 수밖에 없다. 와인의 대중화를 위해 세금을 낮추라는 요구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세제를 조정할 계획이 전혀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일본처럼 가격에 상관없이 한 병당 1백60엔(약 1천5백20원)의 세금을 부과하는 종량세를 도입해달라는 업계 요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신세계 가공팀 심근중 바이어는 “소매업자들이 마진율을 낮추고 새로운 상품을 찾는 것으로는 더 이상의 가격 인하가 불가능하다. 와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재의 추세를 감안해 정부가 세제 개편에 대해 좀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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