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팽창주의 말릴 사람이 없네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08.1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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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그루지야 전쟁 발발 배경과 주변국들의 입장
▲ 8월12일 그루지야의 남오세티야 주에서 러시아 군대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의 사진이 실린 대형 포스터 옆을 지나고 있다. ⓒEPA

흑해 연안의 작은 나라에서 지난 세기의 냉전 악몽을 상기시키는 전쟁이 일어났다. 지난 8월7일부터 시작된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군사 충돌은 전면전으로 치닫는 듯했으나 러시아가 12일 공격 중단을 발표함으로써 5일 만에 새로운 고비를 맞았다. 충돌의 직접적인 발단은 그루지야에서 이탈해 친러시아 노선을 취한 남(南)오세티야 주와 압하지야 주를 둘러싼 영유권 다툼이다. 그루지야는 남오세티야에 군대를 보내 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러시아는 즉각 그루지야 본토에 지상·해상·공중 공격을 퍼부었다. 군사적 열세인 그루지야는 러시아에 휴전을 제의했으나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의 원상 회복을 조건으로 내걸고 휴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시아가 이미 그루지야의 절반을 점령했다는 보도가 나온 가운데 친미 그루지야 정부를 전복시키고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을 전범 재판에 회부하는 것이 작전의 최종 목표임을 러시아는 숨기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보도들에 의하면 남오세티야 주민 2천명이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나토 가입 추진하는 신생 독립국과 실지 회복 나선 푸틴의 충돌

이 난데 없는 전쟁에 세계는 어리둥절하고 있으나 그루지야와 러시아 간 적대의 뿌리는 깊다. 러시아는 그루지야가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탈환하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경고를 수년 전부터 해왔다. 그러나 미국과의 긴밀한 동맹에 자신감을 얻은 그루지야의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이를 무시하고 행동에 나섬으로써 러시아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 화근이었다. 사카슈빌리는 그루지야나 우크라이나 같은 옛 소련 위성국들을 스탈린식으로 탄압하는 러시아에 단호히 맞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무장했다. 그는 나토 가입을 추진하면서 사사건건 러시아의 푸틴을 자극했다. 푸틴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지금은 총리를 맡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러시아 실권자로서 옛 소련의 팽창주의를 재현하고 있다. 따라서 크게 보면 나토의 동진 정책과 러시아의 팽창주의가 충돌한 셈이다.

그루지야와 러시아 국경은 유럽으로 가는 러시아의 송유관이 통과하는 지역으로, 화약고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의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했으나 그루지야 내 러시아 병력 철수를 명하지 않아 언제든지 충돌은 재발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는 “잔류한 적을 향해 발포해도 좋다”라고 말해 상황이 종료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이번 전쟁의 파장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러시아가 군사 강대국인 반면 그루지야는 유럽 민주 체제의 최전선에 위치한 신생 독립국으로서 완전한 시장경제를 추종하는 민주국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쟁은 러시아의 권위주의와 그루지야의 민주 체제가 부딪쳤다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충돌은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냉전의 씨앗까지 잉태한 동서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카슈빌리는 얼마 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그루지야를 1938년의 체코에 비유하면서, 만약 그루지야가 러시아에 굴복하면 러시아에서 분리 독립한 신생 민주 국가들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1921년 첫 민주주의 실험을 볼셰비키에게 유린당한 바 있는 그루지야로서는 거의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들은 러시아가 언젠가 실지 회복에 나설 것이라는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석유 수출로 자신감을 얻으면서 19세기식 팽창주의를 추구하는 러시아에게는, 나토 가입을 추구하면서 미국과의 동맹을 가속화하는 그루지야가 타도 대상 1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루지야인들은 러시아가 “이웃의 진정한 친구보다는 성난 적을 더 좋아한다”라는 비유로 푸틴의 철권 정책을 비꼬았다. 이들은 미국의 전설적 외교관 조지 캐넌이 러시아가 국경에 두기를 원하는 것은 적과 위성국뿐이라는 말을 상기하기도 했다. 심지어 러시아인들의 피에는 정북과 탄압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말까지 한다. 푸틴과 그 측근들은 옛 소련 붕괴 후 1990년대에 겪은 러시아의 굴욕을 새로운 팽창주의로 설욕하고 있다.

발화점이 된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는 러시아와 접경한 전략 요충지로서 그루지야는 이들 지역을 역사적으로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반면 두 지역은 오랜 유혈 투쟁을 통해 그루지야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친러시아로 선회했다. 러시아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 러시아 여권을 발급하는 형식으로 사실상 자국 영토로 병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번 사태에 더 많이 놀란 쪽은 당사자들보다 서방이다. 미국, 유럽, 유엔, 나토 등은 전쟁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나 속수무책인 상태다. 확실한 것은 서방 진영이 그루지야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지난 4월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보류한 조치에 매우 실망한 사카슈빌리는 전쟁이 터졌음에도 서방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데 분통을 터뜨렸다. 미국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이란 문제로 러시아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마당에 분쟁에 개입해 러시아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8월8일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날 부시 대통령은 푸틴 총리와 담소했다. 그날 러시아의 탱크들은 그루지야의 도시를 포격했다. 이는 그루지야 사태에서 미국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국무부 관리들도 미국이 그루지야에 개입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부시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그저 말로만 러시아의 공격 중단을 요구하는 것이 전부였다. 베이징에서 푸틴을 설득하려던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수모를 겪었다. 푸틴은 협상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라는 사르코지의 주문에 “그들에게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라는 말로 딴청을 부렸다. 푸틴은 개막식 직후 남오세티야 국경으로 날아가 현지 군 지휘관들과 작전을 협의했다.

▲ 8월12일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전쟁 중단에 동의한 평화중재안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AP연합

미국, 아프간ᆞ이라크에 발 묶이고 이란과는 핵문제로 딜레마에 빠져

러시아의 이번 군사 작전은 소련 붕괴 이후 가장 단호하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미국의 군사 전략가 조지 프리드먼은 러시아는 이번 작전을 거의 일방적으로 단행함으로써 서방에 기대 러시아에 대항하려는 모든 분리 독립 국가들에게 경종을 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체첸 사태를 어느 정도 진압한 후 여유가 생긴 러시아는 서방의 비호 하에 독립을 쟁취한 코소보 사태의 재발을 차단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 세계, 특히 미국의 옵션은 제한되어 있다. 유엔 안보리를 통해 사태에 개입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안보리의 모든 움직임에 대해 러시아가 비토권을 행사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병력을 파견한 그루지야에 대한 보답으로 이 나라 군대를 훈련시키고 첨단 군사기술을 제공했다. 이것이 그루지야의 간을 너무 키운 측면이 있다. 미국의 지원은 그루지야처럼 협조하면 보답이 따른다는 신호를 보낸 것인데 러시아로서는 참을 수 없는 수모다. 심지어 친미 국가에 포위당하는 위협까지 느끼는 판이다. 결국, 그루지야 사태를 통해 러시아의 결의를 보여줌으로써 자존심과 권위를 회복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 미국은 그루지야를 도울 것인지, 아니면 이란 사태 종식을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을 것인지를 선택할 처지에 놓였다.

최근 여러 분야에서 공격적으로 나오는 러시아의 처신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발이 묶이고 이란과는 핵문제로 딜레마에 빠진 미국의 곤경을 십분 활용한 측면도 있다. 미국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한 미국 외교관은 “미국은 유감스럽게도 침묵하는 교훈을 배우고 있다”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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