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다 체한 사업, 약도 없다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8.08.2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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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ᆞ삼성ᆞ쌍용 등 무리한 확장으로 위기 자초 …오너의 판단 착오 땐 치명상
▲ 대우 자동차 공장을 둘러보는 김우중 전 회장. ⓒ연합뉴스

<삼 국지>를 보면 위나라의 조조와 오나라의 주유가 수상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당시조조는 절대적으로 우위인 병력으로 참패를 당했다. 배멀미를 하는 군사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선단을 쇠고리로 연결한 것이 화근이었다. 배를 하나로 묶다 보니 오나라 군사의 불화살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재계의 과거사를 보면 이런 ‘선단식 경영’으로 낭패를 당한 사례를 적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한 계열사의부실이 다른 계열사로 번지면서 그룹 전체가 위기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대우그룹이 대표적인 예다. 김우중 전 회장은 창업보다는 M&A를 통해 그룹의 덩치를 키운 전형적인 기업 사냥꾼이었다. ‘세계 경영’의 대표 격이었던 대우자동차는 물론 대우조선, 대우증권, 다이너스카드(현 현대카드), 대우전자, 한국중공업(현두산중공업), 경남기업, 세진컴퓨터랜드 등을 M&A로 차지했다. 그룹의 위장 계열사도 한때 100여 곳이 넘었다.

이 과정에서 차입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계열사들이 연쇄 부실의 고리에 걸리면서 그룹 전체가 붕괴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김우일전 대우구조조정본부장은 “결정적인 패착은 대우차에 있었다. 세계 경영이 한창일 당시 공장 건립에 사용된 차입금이 20조원에 달했다. 김 전회장이 자동차 사업만 하지 않았어도 그룹 해체와 같은 최악의 상황은 맞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우중 전 회장이 ‘세진’ 처리만 잘했어도 피해 줄었을 텐데”

김우중 전 회장이 엮어낸 다음의 일화 한 토막은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그는 지난 1995년 컴퓨터 전문 대형 할인점인 세진컴퓨터랜드(이하세진)를 인수했다. 세진의 인수는 대우그룹 M&A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초창기 세진은 대대적인 광고와 매장 확장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주요 컴퓨터 제조업체들이 세진컴퓨터와 제휴를 체결했다. 당시PC 유통망이 없었던 대우 역시 세진컴퓨터에 의존해야 했다. “김 전 회장은 대한전선의 가전과 통신 사업을 인수해 대우전자와 대우통신으로 개명했다. 대우전자는 가전 사업에 주력했고, 대우통신은 케이블과 TDX(전자교환기), PC 사업을 맡았다. 그러나 자체적인 PC 유통망이 없다 보니 세진컴퓨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김 전 본부장의 말이다. 당시 세진은 물품 대금을 후불로 지급하는 조건으로 PC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판매 대금을 모두 광고와 매장 확장에 재투자함에 따라 공급 업체들에게 판매 대금의 상당액을 갚지 못했다.

▲ 김우일 전 대우구조조정본부장(위)이 지난 8월21일 대우그룹해체와 관련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밀린 대금이 계속 불어나자 삼성과 LG 등은 세진과의 거래를 중단했다. 그럼에도 대우는 제휴 관계를 유지했다. 결국 매출 채권이 2천억원까지 늘어났고, 대우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세진을 인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진의 경영 상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고, 그룹 경영이 악화된 지난 1998년 가장 먼저 청산절차를 밟았다. 김 전 본부장은 “밀린 대금이 늘어나자 기조실에서 세진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김 전 회장에게 조언했다. 김 전 회장이 조금만 일찍 손을 썼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삼성자동차 역시 이건희 전 회장의 판단 착오로 출범 4년여 만에 문을 닫은 경우다. 삼성차의 한 전직 직원에 따르면 삼성차의 몰락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할 당시 정부는 중복 과잉 투자와 출혈 경쟁을 우려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삼성은 광범위한 로비를 펼쳤다. 아울러 부산 신호공단에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부산 민심을 자극해 정부를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일정 부분 효과도 보았다. 부산의 시민단체들이 100만명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측면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삼성은 이렇게 무리하게 밀어붙인 대가를 훗날톡톡히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 자동차 공장 부지로 적절하지 않은 곳에 공장을 짓다 보니 예상하지 못했던천문학적인 자금이 추가로 소요되면서 심각한 자금 압박을 받아야 했다. 자동차산업에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충족시키느라 출발점에서부터 막대한 부실을 안았던 셈이다.

메디슨은 ‘재벌 흉내 내기’ 하다 부도

후발 주자였던 삼성은 좋은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최고를 고집했다. 자동차 부품은 물론 공장 설비도 최고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SM5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입소문이 돌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리한 투자로 삼성차는 만들면 만들수록 적자가 나는 기형적인 구조가 되었다. 결국 삼성은 출범 4년 만인 1999년 6월 ‘백기 항복’을 하고 삼성차의 법정 관리를 신청했다. 삼성차의한 전직 직원은 “삼성차의 실패는 한국 재벌 구조의 문제를 생생히 보여준 사례다. 기업을 벌려놓고 보는 오너의 순간적인 판단 착오가 기업에 어떤 부작용을 초래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라고 말했다.

쌍용그룹의 경우 사업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계열사 확장으로 주인을 잃고 헤매는 불상사를 당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쌍용그룹은 재계 서열 6위였다. 건설 경기 호황과 양회 사업 성공을 바탕으로 통신, 금융, 자동차 등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 김석원 회장은 자동차 사업에 특히 관심을 갖고 과감하게 투자였다. 그러나 사업이 지지부진해지자 빚만 지게 되었다. 이 부채가 부메랑이 되어 쌍용그룹 전체를 위기에 빠뜨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위기까지 맞으면서 쌍용차의 부실로 생겨난 부채 1조7천억원을 떠안게되면서 그룹 경영은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김 전 회장은 쌍용정유, 쌍용투자증권, 쌍용중공업 등 알짜배기계열사를 잇달아 팔아치웠다. 그룹의 모태인 쌍용양회마저 지난 2000년 10월 일본 태평양시멘트에 상당 지분을 넘기고 공동 경영 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위)은 자동차 사업으로 고난을 겪었다. ⓒ연합뉴스

재벌 기업은 아니지만 유망 벤처기업이었던 메디슨 역시 ‘재벌 흉내 내기’를 하다 부도를 내고 말았다. ‘벤처 1세대’인 이민화 전 회장은 한때 43개 계열사를 코스닥에 등록시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2002년 1월 유동성 위기로 회사가 부도를 냈다. 이민화 전 회장 역시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메디슨의 몰락이 벤처 거품이 꺼졌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리한 사업 확장이 주된 요인이었다. 거대한 ‘의료 벤처 연방’을 꿈꾸면서 무리하게 투자를 하다가 화를 자초한 것이다. 김선웅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소장은 “기업이 지금까지 해온 것과는 전혀 다른 사업에 진출한다면 그만큼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이럴때 총수의 판단이 중요하지만 대다수 기업이 사업다각화에 치중하다 보면 문어발식 확장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된다. 사업을 확장할 때는 과거의 사례를 교훈 삼아 좀더 세심한 의사 결정 과정이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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