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춤주춤 지지 ‘8월의 악몽’에 산통 깨지려나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8.09.0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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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전당대회 ‘호재’에도 뜰듯 말듯
▲ 오바마 후보는 인베스코 필드에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했다. ⓒEPA

지난 8월26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연설을 듣던 흑인 여성 민주당 대의원 도티 씨(가명)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이날 도티 씨의 손에는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인 버락 오바마와 지원 연설에 나선 힐러리 클린턴의 이름이 적힌 작은 카드가 들려 있었다.

도티 씨는 클린턴이 오바마를 지지하는 연설을 듣자 자신의 정치적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평생을 피부색과 성 차별에 시달렸다는 피해의식을 지닌 이 흑인 민주당원에게 이번 전당대회는 자신의 미래를 새로 여는 이벤트로 느껴졌을 법하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전당대회는 당원을 단합시키기 위한 모임이다. 후보 지명자가 결정된 뒤 추인하는 통과 의례에 불과하지만 당원의 뜻을 모으고 경쟁 상대에 대한 비판을 고조시켜가며 전열을 가다듬는 기회다.
민주당의 덴버 전당대회도 종전과 다름없이 화려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1996년 빌 클린턴의 재선 전당대회 때와는 다르다. 우선 그 어느 때보다 단합과 함께 당원들의 저자세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는 앞으로 대통령 선거일까지 두 달 여밖에 남기지 않았음에도 당원들이 완벽하게 뭉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방증이다. 그리고 오바마에 대한 지지도가 더 이상 오르지 않고 답보 상태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클린턴은 이날 오바마 지지를 밝히면서 자신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도전한 이유와 자신의 정책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자신의 꿈이 오바마의 당선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클린턴은 저소득층, 이민자, 여성이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백악관에 도전했다고 밝히고 오바마를 지지하는 것이 자신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당원들에게 호소했다. 그녀는 오바마 대신 공화당의 존 매케인이 백악관에 입성한다면 자신의 꿈과 희망은 무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티 씨가 감동한 것은 여성 문제와 저소득층 문제, 그리고 오바마 지지가 어우러진 클린턴의 명연설 때문이었을 것이다. 클린턴의 이날 연설은 민주당 대부인 에드워드 상원의원의 능숙하고 힘 있는 연설을 압도했다. 클린턴은 노련미와 함께 서정시를 읊는 듯한 어조, 그리고 단호함과 호소력을 갖춤으로서 그녀가 이번 예비선거를 통해 케네디를 뛰어넘는 정치인으로 도약했음을 과시했다.

공화당 매케인 후보에게 기선 빼앗기며 불안감도

클린턴의 오바마 지지 연설은 오바마 진영의 고민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도티 씨가 오바마와 클린턴의 협력에 감동한 것과 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민주당원 중 다수가 계속 오바마 지지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클린턴을 지지한 민주당원 가운데 27%가 아직도 오바마를 거부하고 있으며, 심지어 오는 11월 선거에서 매케인에게 표를 던지겠다고 대답했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클린턴을 지지한다고 답했던 전국 유권자 가운데 10%가 매케인에게 표를 찍겠다고 대답했다. 오바마 진영이 예비선거에서 서로 상처를 주며 치열한 대결을 벌였던 클린턴에게 지지 연설을 부탁한 것도 이런 어려운 사정에 기인한다.

전당대회를 치르면서 오바마 진영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오바마가 사실상 후보 지명자로 결정된 이후 지지도가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화당의 매케인에게 기선을 빼앗기고 있다. 통상적으로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후보의 인기도가 급상승하면 이를 어떻게 유지해나가느냐가 선거 당일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 지금 한참 지지도가 치솟아도 앞으로 두 달간 싸우는데 벅찰 텐데 매케인에 뒤쳐질 때도 있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오바마 진영에서는 ‘8월의 악몽’을 걱정하고 있다. 지난 2004년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인기가 치솟았던 존 케리 민주당 후보가 대회 이후 갑자기 지지도가 떨어져 부시에게 패배한 경험이 재연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른바 ‘브래들리 효과’가 벌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도 나온다.

지난 198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도전한 톰 브래들리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선거 직전까지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지만 결국 패배했다. 다수의 백인들이 흑인인 브래들리를 정치인으로는 지지하지만 주지사로는 선택하지 않은 결과였다.

오바마 진영은 클리턴을 지지한 백인, 여성, 저소득층과 육체 노동자들이 오바마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현상에 대해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 외에 하버드 대학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라는 이미지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오바마를 평이한 ‘보통사람’으로 포장하려는 전략을 구사했다.

▲ 지난 8월26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바마 후보의 부인 미셸 오바마(맨 왼쪽)와 러닝메이트 조 바이든 상원의원(가운데),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나란히 서서 박수치고 있다. ⓒAP연합

하버드 법대 졸업한 엘리트 이미지가 도리어 불리하게 작용해

그 단적인 예가 오바마가 후보 지명 연설을 하면서 이전과는 달리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단어를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언론은 오바마가 자세를 낮췄다고 논평했다. 또, 전당대회 첫날 부인 미셀 오바마로 하여금 ‘남편 오바마’의 강점을 설명할 기회를 갖게 해 ‘보통 인간 오바마’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미셀 오바마의 이 연설은 백인 중산층의 오바마에 대한 비호감을 바꾸고 좀처럼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중도 부동층들의 시선을 잡기 위한 시도였다.

여기에다 오바마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시킨 인물은 러닝 메이트 조지프 바이든 상원의원(펜실베이니아 주·상원 외교위원장)이다. 바이든은 백인 가톨릭 집안 출신으로 명문이 아닌 델라웨어 대학을 졸업했으며, 고급 언어를 구사하는 오바마와는 아주 평이한 연설을 한다. 바이든은 오바마가 클린턴과 접전을 벌였던 펜실베이니아 주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오바마의 약점 중 하나로 지적받는 대외 정책의 미숙을 해결할 수 있는 외교 전문가다.

그러나 바이든도 무작정 믿을 인물은 못된다. 미국 언론들은 그를 ‘수다쟁이’라고 부른다. 바이든은 작고한 전임 상원외교위원장 제시 헬름즈 의원과 함께 5시간의 비행기 여행을 하면서 동승한 기자들을 상대로 혼자 떠들어 빈축을 산 적이 있다.

당시 바이든에 밀려 기자들과 겨우 3분 동안 이야기한 헬름즈가 “우리 직업은 원래 필리버스터에 강하다”라고 웃어넘겼지만, 말이 많으면 그만큼 문제를 남기게 마련이다. 언론들은 바이든이 자칫 말 실수로 구설에 휩쓸리고 이 구설이 선거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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