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불위 ‘미디어 상왕’을 누가 막으랴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8.09.0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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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뉴시스

’상왕(上王) 정치’라는 말이 부쩍 회자되고 있다. 최근 KBS 2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사극 <대왕 세종>에서 세종은 등극 초기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부왕(父王) 태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태종은 병권을 거머쥔 채 상왕 정치의 권력을 휘둘렀다. 지난 1988년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직후 퇴임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상왕 정치를 펼치려 한다는 여론이 들끓은 적도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상왕 정치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때문이다. 물론 앞의 두 경우와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태종이나 전 전 대통령은 후임 권력자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차원이었지만, 이 전 부의장과 최위원장은 ‘아우 대통령’을 위해 궂은일을 도맡아 헌신하는 성격이다.

지난해 12월 17대 대선에서 이대통령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직후 시선은 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단순히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말로는 그 표현이 부족한 두 사람이었다. 일각에서는 ‘이상득 국회의장, 최시중 국무총리’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잘 아는 주변에서는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당시 선거운동 캠프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두 분은 오로지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일념 하나로 헌신한 것일 뿐, 어떤 대가나 자리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다. 가족이란 게 그래서 좋은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대통령과 이 전 부의장뿐만 아니라 최위원장에게도 서슴없이 가족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의 끈끈함이 묻어나는 대목이었다. 실제 이 전 부의장 주변에서는 18대 총선 불출마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최위원장 역시 선거 당시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잊혀질 정도의 기간 동안 떠날까 한다”라는 말로 2선 퇴진을 시사했다.

하지만 두 노(老)정객은 선거 전후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전 부의장은 총선 출마를 강행했고, 최위원장은 신설 기구인 방송통신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 당내 소장파와 야당의 극심한 반발을 무소불위로 뚫고 밀어붙였다. 왜 그랬을까.

여당의 한 관계자는 그 이유를 기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두 노정객의 직감으로 볼 때, 새롭게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의 행보가 결코 간단치 않을 것으로 보였음직하다. 야당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민주당은 구심점을 잃고 총선 참패도 예견된 터였다. 문제는 여론과 당내 역학 관계였다”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나라당 내에 엄연히 존재하는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한 차기 대권 주자들과 ‘소장파’에 대한 두 노정객의 불신이 깔렸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집권 내내 정권의 불안정에 시달린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8월13일 유재천 KBS 이사장(오른쪽 두 번째)이 KBS 사장 선출을 논의하는 임시이사회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인수위 시절 최위원장 최측근 3인이 합작해 만든 방통위

또한, 지난 10년 정권에서 견고화된 방송과 인터넷의 좌파 성향은 여전히 이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노회한 두 정객은 ‘당선만 되면 그것으로 우리의 역할은 끝이다’라는 당초의 생각에서 ‘정권 초기 ‘아우 대통령’이 안정적 집권 기반을 구축하도록 도와줘야 한다’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실제 최위원장이 지난 대선 직후 한 월간지와 가진 인터뷰에 이런 소회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차기 정권은 정말 험난할 것이다. 야당 그룹은 투쟁에 이력이 난 사람들이다. 비정부기구(NGO) 그룹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당내 불씨도 여전하다. 이당선인이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가 힘들 것이다. 이 상황을 헤아리다 보니 남들 보기에는 호사스러운 고민이라고 할지 몰라도 정말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라고 심경의 일단을 피력했다.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이 전 부의장은 당에 남기로 했다. 당적을 버려야 하는 국회의장 자리는 과감히 포기한 채 한나라당 중진회의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한국갤럽 회장을 지낸 최위원장은 여론 쪽을 맡았다. 총리설·국정원장설이 나돌던 그는 결국, 방통위원장을 선택했다. 인수위 시절 방통위가 뒤늦게 급격히 부상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방통위의 탄생은 사실상 최위원장의 작품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당초 이명박 캠프의 안은 6개월 정도 한시적 성격의 특별 기구인 ‘21세기 미디어위원회’의 설립이었다. 이 특별 기구로 새 정부의 미디어 정책을 실현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6개월의 기간 안에 미디어 환경을 새롭게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부 부처 내에 ‘정보미디어부’의 신설이 새 방안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정권의 방송 언론 장악이라는 비난이 부담스러웠다. 또한 일개 장관은 최위원장의 위상에 어울리는 자리도 아니었다.

인수위는 고민에 빠졌다. 박재완 정부혁신규제개혁TF팀장(현 청와대 국정기획 수석), 박형준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간사(현 청와대 홍보기획관), 이재웅 기획조정분과 산하 방통TF위원 등 3인이 머리를 맞대고 새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모두 최위원장이 신뢰하는 측근들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방통위는 대통령 직속으로 기존의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의 기능에, 문화부에서 가지고 있던 방송 정책권까지 통괄하는 실로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다.

최위원장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미디어 프로젝트’ 그림의 첫붓을 잡는 시점이었다. 최위원장의 행보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거침없었다. 독립성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방통위원장에 대통령의 ‘멘토’가 웬 말이냐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거센 반발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통령의 지원도 확고했다. 방통위원장은 장관급이지만 실제 그의 행보는 한승수 총리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았다. ‘미디어 대통령’이라는 말도 서슴없이 나왔다. 방통위를 출입하는 한 일간지 기자는 “최위원장의 위세는 안에서 보면 더 대단하다.심지어 한 위성채널 방송사 사장은 최위원장을 한 번 만나기 위해서 며칠씩 들렀다가 겨우 복도에서 1분 만나고 돌아간 적도 있다”라고 전했다.

야당의 ‘방송ᆞ언론 장악’ 비난과 당내 견제 거세져

방통위의 출범과 함께 최위원장의 ‘미디어 프로젝트’의 실체도 서서히 그 베일을 벗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밑그림은 지난 6월 초 한 인터넷 언론에 의해 입수된 방통위의 내부 보고용 초안 자료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46면 기사 참조). 공영방송에 대한 문제점과 일부 공영방송의 민영화 방침에는 최위원장의 철학이 짙게 깔려 있다. 최위원장이 가장 먼저 칼을 빼든 것은 역시 KBS였다. “KBS를 그대로 둔다면 제2의 촛불 집회 사태는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라는 것이 최위원장의 지론이었다. 지난 6월5일 KBS 이사장이 유재천 한림대 교수로 전격 교체되었다. 이사장 선임 배후로 서울대 동기인 최위원장이 거론되자 그는 언론에 “최위원장과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다”라며 반박했다. 하지만 실제 확인 결과는 달랐다. 최위원장이 한국갤럽 회장으로 있을 당시 두 사람은 방송기자클럽의 세미나에서 나란히 주제 발표를 하는 등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차기 KBS 사장으로 유력시되던 김인규 전 KBS 이사 역시 최위원장의 서울대 정치학과 후배다.

일단 KBS 사장 교체를 비교적 무난하게 처리하는 수완을 발휘한 최위원장의 다음 카드는 MBC와 KBS 2TV의 민영화 문제가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KBS 사장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최위원장이 휘두르는 칼날이 점점 날카로움을 더해가는 만큼 그 저항의 기류도 거셀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그런 견제 움직임이 일부에서 포착되기도 한다. 사정 기관에 몸담고 있는 한 관계자는 “최위원장의 주변과 관련된 모종의 투서가 돌고 있는 것으로 안다. 청와대에서도 포착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전했다. 수소문 결과, 최위원장과 직접 관련된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주변 측근과 관련된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17일 최위원장의 주도로 비밀리에 진행된 ‘7인 회동’의 기밀이 외부로 새어나간 부분도 의미심장하다. 내부 발설자가 없고서는 알려지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참석했던 7인 가운데 한 명이 유출자로 지목되고 있다. 어쨌든 최위원장으로서는 안팎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견제를 받고 있는 셈이다.

최위원장의 지난 행적을 살펴보던 중 기자는 우연히 40여 년 전에 발간된, 색이 바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신문평론> 1965년 4월호에는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동양통신사 기자로 갓 입사했던 최위원장이 기고한 ‘견습 기자의 눈에 비친 언론계’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정부의 특혜를 규탄하면서 언론 기관 스스로는 각종 특혜를 누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특혜를 종빙(慫憑)하고 음폐(陰蔽)하는 기능마저 있고, 사회의 부정을 고발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적당히 처리하는 명수가 되는가 하면, 인권과 노동자의 권익을 제창하는 선봉인 듯한데 언론인들의 권익을 위한 경영자측의 배려나 언론인 스스로의 투쟁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형편이니 어쩌면 이렇게 (언론은) 한국적 모순과 부패를 콤플렉스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바로 이런 점이 (언론이) 사회의 거울이라는 칭호(稱號)에 적합한 것인가. 이러한 현황으로 한국 언론은 얼룩진 거울이 되어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우리의 오늘을 그릇 파악하게 하고 위정자는 이것을 이용하려고 하니 언론의 횡포와 불성실은 우리 사회의 진보를 저해하고 방향 정립마저 어지럽히고 있지 않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

수습 딱지를 갓 뗀 기자의 글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성 언론 사회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당시로서는 상당한 파문을 일으킬 만한 내용이었다. 선배를 향해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던 새파란 견습 기자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미디어 사령관’에 올랐다. 최위원장의 ‘미디어 프로젝트’가 40년 이후에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40여 년 전 자신이 쓴 글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 것도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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