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냄새에 뚫린 국가 안보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8.09.0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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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원정화 사건 추적/안보 강사로 부대 들락거리며 장교ᆞ부사관 농락…국방부 ‘패닉’ 상태
▲ 이상희 국방부장관이 8월28일 국방부에서 위장 탈북자 간첩 사건 관련 군 수뇌부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있다. ⓒ뉴시스

10년여 만에 간첩 사건이 터지면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더욱이 여간첩 한 명에게 군 장교 여러 명이 농락당했다. 국가 안보 체계는 물론 군 장교들의 안보의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을 알 수 있다. 언론들은 군의 기강 해이를 연일 질타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여간첩의 행적을 보면 군의 안보 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알 수 있다. 사회 전반에서 전방 철책이 뚫린 것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새터민으로 위장한 간첩 원정화(34)는 지난 2001년 10월 중국을 경유해 국내로 들어왔다. 그동안 막연하게 떠돌던 ‘새터민 간첩’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새터민들은 원정화 사건의 여파로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원씨는 처음부터 군 핵심부를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철저하고 조직적으로 군 간부들에게 접근했다. 혈기 왕성한 군 장교들과 접촉하기 위해 자신의 성을 이용했다. 그녀에게 포섭당한 군 장교와 부사관이 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이 원씨와 성관계를 가졌다.

원씨는 군 장교들과 접촉하기 위해 다양한 채널을 이용했다. 그중 하나가 결혼정보업체다. 지난 2005년 결혼정보회사에 회원으로 등록한 후에 김 아무개 소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곧바로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원씨는 김소령을 북한으로 납치하려다 실패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원씨에게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군이었다. 기무사령부는 원정화를 안보 강사로 발탁해 군부대를 출입하게 해주었다. 영락없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원씨는 안보 강사를 하면서 군 간부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여기서 빼낸 기밀은 북한 국가보위부로 넘겼다.

정훈장교인 황 아무개 대위(26)와 만난 것도 안보 강사로 활동하면서다. 원씨와 황대위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면서 동거를 시작했다. 황대위는 나중에 원씨가 북한 국가보위부 출신의 간첩이라는 것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고, 오히려 간첩 활동을 도왔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원정화가입수한 군부대 위치, 군 장교 인적사항 같은 군사 정보가 고급 기밀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은 기밀 등급이 낮은 관리요망 수준이라고 한다.

이번 여간첩 사건이 터지자 군은 고개를 떨구었다. 간첩 혐의에 대한 공안 당국의 내사가 시작된 이후에도 원씨는 군부대 안보 강연을 수십 차례나 실시했다. 원씨가 검거된 후에야 국방부는 뒤늦게 대책을 세우며 난리법석이다.

▲ 수원지검이 공개한 여간첩 원정화의 간첩 활동 증거물. 증거물에는 공작금으로 사용했던 남성 건강보조식품도 포함되어 있다(맨 위). 위는 원정화가 중국에 머무를 당시 찍은 사진. ⓒSBS 화면 캡쳐

국정원은 위장 탈북한 새터민 중점 관리하기로

지난 8월28일 오전 9시 국방부 대회의실에서는 이상희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각 군 총장 등이 모여 탈북자 위장 여간첩 사건 관련 긴급 대책회의를 가졌다. 이장관은 “여간첩 사건에 현역 간부가 연루된 것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이장관은 또 “여간첩에게 동조한 것은 분명한 이적행위이며, 현역 장교로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날 회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침통한 분위기가 역력했다고 한다.

국방부는 우선 전군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특별 정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했다. 위장 간첩 남파 및 군대 침투 사례를 교육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응책을 설명할 예정이다. 군부대 안보 강연에 활용하고 있는 새터민 출신 강사의 신원도 철저하게 검증하기로 했다. 아울러 해외 파병 장병에 대한 대비책도 강구 중이다. 지금까지 느슨했던 군의 안보 체계를 총점검하겠다는 뜻이다.

국방부 원태재 대변인은 “유사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 전군을 상대로 특별 보안 진단 활동에 착수, 인원·시설·통신·전산·문서보안 실태 점검을 하고 외부인 영문 출입 통제 시스템을 점검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또, 오는 12월 발간될 <2008 국방백서>에 북한군이 실체적인 위협임을 강조하는 문구를 삽입하기로 했다. <국방백서>에는 ‘북한군이 현시적이고 실체적인 위협임을 명확히 표현’할 예정이다. 다만 ‘주적’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격년제로 발간되는 <국방백서>의 ‘주적’ 표현은 2004년 <국방백서>에서부터 빠졌다.

국가정보원은 위장 새터민으로 의심되는 탈북자를 중점 관리 대상으로 분류하기로 했다. 국정원은 이를 위해 새터민들이 허위로 진술하는지 가려낼 수 있는 심문 내용을 추가하는 등 관계기관의 합동 심문을 강화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간첩 사건은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에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군 내부와 보수 진영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안보 체계가 무너졌다고 말한다. 햇볕 정책에 급급한 나머지, 정작 국가 안보에는 소홀했다는 지적이다. 그 단적인 예로 지난 10년간 간첩을 기소한 건이 거의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양대 정부에서 간첩을 기소한 것은 지난 2006년에 일명 ‘일심회 사건’ 관련자가 유일하다.

보수 단체와 보수 언론들은 정부를 향해 구멍 뚫린 국가 보안 시스템을 원상복귀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총체적인 공안 시스템 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은 이번 여간첩 사건에 대해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한나라당은 여간첩 사건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10년간 진행된 햇볕 정책의 폐해로 몰았다. 이에 반해 민주당 등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정부·여당은 시대착오적인 신공안 정국 조성에 골몰하지 마라”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이번 여간첩 사건의 사실관계는 추후 밝혀지겠지만, 안보 불감증에 빠져 있는 군의 실상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군이 지난 10년간 펼쳐진 남북 화해 무드에 휩쓸리면서 남북대치 상황에 대한 인식이 무뎌졌고, 이로 인해 곳곳의 방어 체계가 부실해진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여간첩 한 명이 성을 무기로 여려 장교들을 농락하며 군영을 활보한 것만 보아도 군기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여야가 공안 정국 시비를 벌이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는 별개의 문제다. 군이 제 구실을 못할 지경이라면 나라와 국민이 위태로워진다. 군의 무력증이 허술해진 대북 자세에서 나온 것인 만큼 그 구체적인 원인을 낱낱이 찾아내 바로잡아야 한다. 여간첩 한 명 때문에 총체적 망신을 당한 군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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