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지갑’ 여든까지 간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8.09.09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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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황문성
언제부턴가 우리네 가족 관계에서 ‘부양’이라는 말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다. 부모나 자식이나 서로 ‘부담’으로 여겨 꺼리기 때문이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요즘은 30, 40대부터 노후 준비에 나서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전직이나 창업으로 여유로운 전원 생활 등‘황금 노후’를 일찌감치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기업에 다니는 박 아무개씨(46)는 지난 주말 우연히 부산역사에서 한동안 부장으로 모시다 은퇴한 직장 선배를 만나고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 허름한 옷차림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박씨가 “왜 여기에 계시냐”라고 묻자 선배는 후닥닥 사라지려 했고, 재빠르게 따라 잡은 끝에 그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올해로 육순을 넘기고 예순한 살이 되었다는 선배의 사연은 기가 막혔다.

“내 이럴 줄 알았나. 퇴직할 무렵에 큰 아들은 대학을 졸업했고 작은 아들은 대학 4학년이라서 자식 농사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두 아들 녀석이 한동안 취업을 못해 헤맸고, 큰 아들만 어떤 중소기업에 들어갔는데 벌이가 시원찮았지. 퇴직을 하고도 생활비는 이전과 다름없이 지출해야 했고, 다 큰 자식들 뒷바라지까지 하다 보니 2억여 원의 퇴직금이 대책 없이 줄더라고. 큰아들 장가보내는데 거의 1억원 정도 쓰면서 퇴직금은 다 날리고 말았어. 무엇으로 먹고살지 생각하니 앞날이 캄캄했지. 결국 일원동 43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일산으로 이사하면서 챙긴 4억원으로 새 삶을 시작했는데, 몫돈을 가지고 차린 돼지갈비집이 망하는 바람에 다시 무일푼 신세가 되고 말았어. 얼마 전부터 자식 부부까지 일산 집에 들어와 사는 바람에 집안에 있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지. 그래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부산역에서 기거하고 있어. 서울역에 있으면 아는 사람들을 볼 수도 있잖아. 자네를 보았으니 이제 다른 역으로 옮겨야 할 것 같네.”

박씨는 선배의 말을 듣고 있다가 모골이 송연함을 느꼈다. 젊은 시절 능력 있는 선배로 존경했던 부장님이 어떻게 노숙자 신세가 된 것일까. 노후를 생각하고 살라는 선배의 말이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자신의 미래도 잘못하면 마찬가지가 되지 않나 하는 불길한 감정이 쓸고 지나가기도 했다.

박씨가 목격한 경우는 아주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자식이 늙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아 선호 사상의 밑바탕에는 ‘부모 부양’이 깔려 있던 것이 사실이다. 부모는 아들을 ‘노년의 보험’ 성격으로 여겼고, 집안의 장남은 늙은 부모 모시는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부모와 자식 간에 ‘부양’이라는 말은 어느새 금칙어가 되고 있다. 서로 ‘부담’으로 여겨 꺼리기 때문이다. 부모 부양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자녀가 줄어들고, 자녀에게 의지하지 않겠다는 부모도 늘어나고 있다. “내 노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도 부모한테 의지하지 마라”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젊어서 노년 생활을 준비하지 못하면 비참한 말로를 맞을 수밖에 없다.


20대 50%, 30대 70% “노후 준비하고 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요즘 30, 40대 직장인 사이에는 ‘노후 준비’가 최대 화두다. 한참 삶의 보람을 찾을 나이에 벌써부터 노후를 걱정하고 있다. 정년은 점점 짧아지고 조기 퇴직에 대한 불안감이 노후 준비를 앞당기는 요인이다. 막상 취업을 하더라도 사오정(사오십세 정년)이니 오륙도(오십육세 도둑)이니 해서 정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취업하자마자 노후 준비에 나서는 ‘노후 조로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20대의 약 50%가, 30대의 약 70%가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결과치가 나왔다. 직장인들이 꼽는 노후의 성공 조건 1순위는 돈이다. 돈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행복지수가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후 성공=돈’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래서 돈을 모으는 데만 ‘올인’하다시피 하는 직장인이 많다.

지난해 서울 소재 대기업에 입사한 박정환씨(29)는 1년 만에 재테크 전문가가 다 되었다. 월급을 받으면 최소 생활비를 제외하고 주식, 펀드 등에 투자한다. 그는 “아침에 지하철을 타면 꼭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무료 신문을 수거하는 60, 70대 노인들이다. 가만히 그 노인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언젠가 저런 모습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일단 젊었을 때 최대한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1년 동안 주식 투자를 해서 자신의 연봉만큼 벌었다고 귀띔했다.

지금까지 나온 각종 자료를 보면 은퇴 자금으로 평균 10억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한때 직장인들 사이에 ‘10억원 모으기’ 열풍이 분 것도 이런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 30세인 봉급생활자가 60세에 은퇴하고,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30년간 벌고, 20년간의 은퇴 생활비가 필요하다. 한 달에 약 2백50만원 정도의 생활비가 들어가야 하고, 기타 병원비 등을 따지면 10억원은 있어야 여유롭게 살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렇다고 직장인들이 월급만 가지고는 행복한 노후를 기약할 수 없다. 10억원을 만든다는 것도 쉽지 않다.때문에 젊은 층은 물론 은퇴를 눈앞에 둔 청·장년층은 노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다. 30, 40대 직장인들의 노후 준비 수단은 대부분 재테크에 맞추어져 있다. 부동산이나 주식, 펀드 등에 투자해서 목돈을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위험 부담이 따르고 한계도 있다.

노후 준비에서 돈부터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금융회사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한 비즈니스 차원에서 돈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퇴자협회 황정애 수석이사는 “절대 돈 먼저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지 가치관의 문제를 고민하라”라고 강조했다. 젊은 층의 노후 대비 방법으로 꼭 재테크만 있는 것은 아니다. 30, 40대 중에는 은퇴한 이후의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미리 새로운 인생을 연 사람들도 있다.

▲ 철강회사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정은영 상무(맨 왼쪽)와 창업을 선택한 양상규 사장(왼쪽). ⓒ시사저널 임영무
전남 광양에 있는 삼광종합철강 정은영 상무(38)는 한때 잘 나가는 방송광고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한창 때는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보다 몇 배의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회사에서도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서 장래가 보장될 정도였다. 정상무도 방송 광고 영업에 인생의 승부를 걸겠다고 마음먹었다. 언론대학원 광고홍보학과에 진학해서 전문성도 키웠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무한 경쟁 속에서 언제까지 살아남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개인 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전남 광양에 있는 철강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영업부장 자리를 줄테니 일할 생각이 없느냐”라는 것이었다. 정상무는 처음에는 의아스럽게 생각했지만, 서울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터여서 깊이 고민했다. 마침 광양에 처가가 있어서 연고도 있었다.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상무는 올해로 광양에 내려간 지 6년째가 된다. 그는 요즘 1인 3역을 할 정도로 바쁘다. 평일 낮에는 직장에 다니면서 주말에는 가족들과 산과 들로 캠핑을 다닌다. 틈틈이 지역 봉사단체에 나가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봉사 활동은 정상무가 은퇴 후에 꿈꾸었던 일이다. 지방에서 살다 보니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는 “그때 내 선택이 옳았다. 여기 생활에 만족한다.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봉사까지 할 수 있다. 서울보다 오히려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정상무도 노후 대비를 하고 있는데 서울과 비교해서 물가가 싸고 지출이 적어서 은퇴 준비가 더 쉽다고 한다.

직장 생활 접고 과감히 귀농, ‘전원 생활’ 터를 잡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창업으로 노후 준비를 한 사람도 있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치어스’ 신영통점 양상규 사장(41)이 그 주인공이다. 양사장은 외국계 반도체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지난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반도체회사에서 마흔이 넘으면 환갑에 들어섰다고 할 정도로 비전이 없었다. 양사장은 이직하는 것보다 아예 창업을 해서 미래도 준비하고 목돈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서울과 수원에서 개최되는 프랜차이즈 박람회에도 찾아가고 각 회사의 사업설명회를 쫓아다니다가 생맥주 전문점인 ‘치어스’를 선택했다고 한다.

▲ 강원도 춘천으로 귀농한 후 농사를 짓고 있는 김태수씨와 그의 가족들.
양사장은 자신의 집을 담보로 해서 은행에서 약 3억원을 창업 자금으로 빌렸다. 그리고 지난 6월20일 가게 문을 열었다. 양사장은 창업 2개월 만에 월 매출이 약 4천만원에 육박하고 있다. 순이익은 약 8백만원 정도라고 한다. 이제 갓 창업한 것치고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지금처럼 장사가 잘 되면 2년 후에는 은행에서 빌린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을 것 같다. 창업이 쉽지 않은 선택이었는데, 발품을 많이 팔고 고객 서비스를 다양화한 것이 성공 요인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30, 40대 직장인들은 창업에 관심이 많다. 성공만 하면 일석이조를 거둘 수 있다. 정년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목돈을 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창업이 성공의 지름길은 아니다. 막상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서 쉬운 선택도 아니다. 창업연구소 이상헌 소장은 “직장인들은 창업을 생각하면서 ‘뭐든 창업하면 먹고는 살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나만의 경쟁력’을 개발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직장인들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것이 ‘전원 생활’이다. 은퇴 후에는 조용한 시골로 내려가 텃밭을 일구며 전원 생활을 꿈꾼다. 30, 40대 중에는 도시 생활을 과감하게 접고 귀농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강원도 춘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태수씨(43)도 그중 한 사람이다.

김씨는 대학 졸업 후 노동단체에서 상근자로 일했다. 하지만 매일매일 칼날 위를 걷는 심정으로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탈출을 꿈꾸었다. “나이 사십 넘어 아파트에 우두커니 있는 내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귀농이 뭔지도 모른 채 그냥 시골에 집 하나 짓고 살고 싶다는 꿈만 꾸었다. 학교 선배가 자리 잡은 시골에 땅 좀 나누어 팔라고 보채어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 ‘새낭골’에 3백평을 사서 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시작했다”라고 한다. 김씨는 지난 2002년부터 집 인근에 1만6천5백29m²(5천평)의 임야를 임대해서 고추, 마늘, 파 등을 재배했다. 김씨는 “처음부터 거농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어서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 평당 3천원 정도 나오는데 경제 활동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지금의 귀농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새낭골 귀농일기(www.senang.co.kr)’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고 귀농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적고 있다.

TV 광고 카피 중에 ‘열심히 일한 자여, 떠나라’가 있다. 여행을 가든 휴식을 취하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대다수 직장인은 노후 준비를 위해 현재의 삶의 질을 포기하다시피 한다. 행복한 은퇴 생활을 위해 젊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 정말 행복한 노후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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