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집’ 짓고 아내는 ‘일상’ 조각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승인 2008.10.1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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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조각가 김경민·권치규 씨의 예술적 ‘동상이몽’

사람마다, 장르마다 다르기에 일반화시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같은 작가들이 부부를 이루고 살 때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고들 말한다. 다른 장르에 비해 공구와 시설 등이 많이 쓰이는 조각의 경우는 장점이 훨씬 많다. 대개의 경우 그림은 혼자 할 수 있지만 조각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해야 하는 작업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같은 생활 공간과 작업 공간에서 함께 살고, 또한 같은 공구나 연장을 쓰면서도 작품 세계만큼은 대체로 상이하다는 것이 흥미롭다. 오랜 결혼 생활을 통해서도 서로 동화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모습은 흥미로운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최근 부부가 동시에 개인전을 앞두고 있는 김경민·권치규 부부 조각가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김경민은 여성 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는 내용들을 해학적이면서도 풍자적인 구성으로 많은 작품을 발표해왔다. 동시대의 어떤 작가도 흉내 내기 힘든 탁월한 모델링 역량을 바탕으로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내용들을 일기 쓰듯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표현해 주목받고 있는 작가이다. 김경민의 등장은 엄숙주의 조각계에 발랄하고 참신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삽화나 동화를 보는 것처럼 경쾌하고 산뜻한 장면이야말로 엄숙주의 조각계에 활력소이자 무언가 달라진 조각의 환경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물론 코믹한 형상을 통해 젊은 감각의 조각을 선보인 것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김작가만큼 섬세하고 감각적인 구성을 보인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작품 속에 표현되고 있는 인물들은 주로 김작가의 가족이다. 세 자녀의 엄마로서 가사 생활과 육아의 체험들이 작품에 그대로  용해되어 있다. 온 가족을 겹치기로 업고 있는 엄마의 모습, 딸의 등교를 도와주고 있는 아빠의 모습 등 평범한 가족사를 소재로 해 자신의 작품은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잡다한 감정의 내용들을 승화한 것들이다. 김작가의 작품이 우리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는 것은 단순히 코믹한 설정이나 연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감수력이 결집된 결과라는 점 때문이다. 

김작가의 이러한 감각과 재능은 단순히 생활의 단편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구조나 관행들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내용들의 작업도 적지 않다. 부유층의 허영심이나 권력 앞에서 펼쳐지는 꼴불견을 해학적으로 공격하는 풍자적인 작품들이 초기에 특히 많았다. 사실 이러한 사회 풍자적 내용의 작품들은 절제와 조절이 관건이다. 자칫 방만하게 접근한다거나 성급하게 접근하다 보면 잃기 쉬운 것이 사회성이나 정치성을 담는 것이다. 다행히 김작가는 특유의 순발력과 유머 감각으로 절제된 구성과 디테일로 성취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작가가 의도한 내용들을 자유롭게 표현해낼 수 있는 모델링 능력이야말로 이러한 풍자적인 표현의 밀도를 높여주는 기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해학·풍자, 남편의 관념적 작품과 대비

남편 권치규의 작품 세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내와 대조적이다. 그의 작품은 관념적이고, 절제되고 개성적인 형식과 구조 속에 존재의 궁극적 문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탐구하고 있다. 작가의 조각은 숫제 집을 한 채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 집 모양의 구조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건축적이면서도 기념비적인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권작가가 전시할 때마다 전시장 안에 하나의 집을 짓다시피 공들여 만든 대형 작품에 그의 표현 내용이 잘 압축되어 있다.

집의 한쪽 벽으로부터 시작된 형태는 주름을 따라 소실점 가까이 가면 또 다른 단면의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이 두 면이 서로 마름모의 대칭 상태이다 보니 작품의 뒤쪽으로 가보아야 확인할 수 있다.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지점 가까이서 확인되는 이미지는 사람, 나무 등의 모습들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권작가는 의미심장한 존재론적 해석을 제시한다. 집이라는 문명(욕망)이라는 실재를 원근법적으로 투시할 때 자연 혹은 인간이라는 본질적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 우리의 현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품마다 부여된 특유의 투시적 수렴을 암시하는 방법으로서 주름질은 대단히 독특하다. 움직임이 있는 형태의 경우는 속도감에 따른 시간의 전개도와도 같고, 정지된 대상의 경우는 투시의 암시와도 같은 것이다. 권작가만의 이런 장치가 뜻밖에도 수다스런 말보다는 침묵을 더욱 요구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 주름질 효과는 평면으로만 주어진 단면과 대조를 이루면서 이미 작가가 의도하고 기대하는 것의 상당 부분을 성취시켜주는 신뢰할 만한 장치임에 틀림없다.

권작가는 근작에서 바로 이러한 주름질 구조를 더 발전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구조의 안과 밖, 암수,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상호 작용과 조합으로 나타난다. 어떤 형태(존재)는 반드시 그것을 잉태한 또 다른 존재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작가는 그것들의 조합이나 상호 작용을 몇 가지 단면들을 통해 해부학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앞면만이 아닌 뒷면도 보아야 하는 그의 작품은 바깥만이 아니라 속까지도 살펴볼 때 절묘한 존재의 섭리를 좀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안쪽을 수고스럽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 일정 부분 단면 구성을 통해 권작가는 친절하게 그것들을 보여주는 배려를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한 번쯤이라도 사물이 보여주는 외관(사실)과 내면(진실) 간의 어떤 일련의 작용들에 주목해볼 것을 조용히 권고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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