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청거리던‘금융 제국’은 거기에 없었다
  • 뉴욕 이철현 편집위원 ()
  • 승인 2008.10.2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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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일이 왜 일어났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전세계를 불안의 도가니로 몰고 간 금융 위기의 진앙지 월스트리트를 현지 취재했다.


한 고비를 넘기나 했던 글로벌 경제가 다시 요동을 치고 있다. 주가는 폭락과 폭등을 거듭하고 환율은 그야말로 널뛰기를 하고 있다. 각국 경제가 이대로 롤러코스트를 탄 채 기나긴 암흑의 터널로 들어서는 것일까. 지금 우리 사회에는 월스트리트의 탐욕이 부른 금융 위기에 왜 속절없이 당해야 하는지 분통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금융 자산이 반 토막이 나고, 남들 따라 투자했다가 졸지에 집을 날리거나 신용불량의 위기에 몰리자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의 머니게임이 한창 끗발을 올릴 때 한국 경제도 적지 않은 떡고물을 챙겼다. 실물 경기가 침체를 면치 못해도 종합주가지수는 2천 선을 넘어서며 돈 잔치를 벌였다. 결국 우리 경제는 월스트리트가 웃으면 덩달아 웃고, 월스트리트가 울면 덩달아 우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무려 30년 가까이 펼쳐진 신자유주의 경제는 이렇듯 뉴욕발 금융 위기로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경제를 혼돈과 질곡에 빠뜨렸다. 신자유주의는 과연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될 것인가. 금융자본주의의 메카인 미국이 이미 은행들의 지분을 인수하겠다며 시장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던 믿음은 이제 사라졌다. 세계 경제는 공권력이 시장을 규제하며 관리하는 기형적인 ‘관치 자본주의’ 형국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한국 경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제 월스트리트는 없다. 미국 당국의 구제 조치로 살아난다 해도 신뢰를 잃은 마당이어서 예전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세계 경제의 흐름에 어긋나서는 안 되겠지만 나름으로 생존 기반을 확고히 할 한국형 모델이 절실하다. <시사저널>은 ‘현대경제연구원’과 공동으로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창간 기념 기획물을 내보낸다. 먼저 금융 위기의 진앙지인 월스트리트를 찾아 현지 사람들의 변화상을 둘러보고, 이들이 작금의 위기를 부르게 된 경위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런 다음 전문가들의 견해를 통해 한국 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을 위해 장·단기적으로 추구해야 할 핵심 과제들을 살펴보았다. 

▲ 지난 9월 24일 하원 금융 위원회에서 구제금융 계획에 관해 증언하는 폴슨 미국 재무장관(가운데). ⓒ연합뉴스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은 10월14일 아침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세라 베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사장을 대동하고 미국 재무부 청사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세 사람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폴슨 재무장관은 ‘누구도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추진해야 하는’ 금융시장 개입 조치를 완성하느라 주말 내내 동분서주해야 했다. 버냉키 의장과 베어 사장의 처지도 별 차이가 없었다. 폴슨 재무장관과 함께 미국 경제, 아니 세계 경제의 운명을 짊어진 이들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주말을 미국 워싱턴 D.C. 펜실베니아 애비뉴 1500번지에 위치한 재무부 청사에서 보내야 했다. 이날 각자 작성한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가는 세 사람의 목소리에는 절실함과 간절함이 배어나왔다. 폴슨 재무장관은 “미국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를 시급히 회복시키지 않으면 금융 시스템 전체가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에 전례 없는 조치를, 전례 없는 속도로 단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부시 미국 대통령과 미국 상·하원은 ‘공무가 아니면 저녁 식사도 함께 하지 않을 것 같은’ 세 사람에게 금융 위기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부시 대통령은 20%도 넘지 못하는 국정 지지도와 얼마 남지 않은 임기로 국정 지도력을 상실한 탓에 세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미국 의회는 지난 10월 초 궁극적으로 납세자가 부담해야 할 7천억 달러(8백조원가량)를 어디에 쓸 것인지를 이들에게 일임했다. 어쩌다 미국 최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된 이 삼총사는 ‘세계 자본주의의 수호신’을 자처하던 미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삼총사에게는 미국 경제를 ‘신뢰의 충격(confidence shock)에서 구원하기 위한 비상 조치’라는 명분이 있다.

‘진실의 자리’로 끌려나온 세계 금융의 주역들

▲ 미국의 구제금융 조치에 관한 뉴스 자막이 시선을 끌고 있는 뉴욕 거리.

또, 얽힐 대로 얽힌 금융 위기 상항을 이들보다 더 잘 이해하는 정책 입안자도 없다. 금융 위기의 속성상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정책 효과가 반감될 수 있어 삼총사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2천5백억 달러 투입’ ‘은행 부분 국유화’ ‘예금 보호 한도 확대’ ‘은행 임원 보수 한도와 배당 정책 제한’ 같은 금융 위기 완화 정책이 발표되었다. 이 조치들이 보수 우파를 자처한 부시 행정부 치하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크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마저 아연실색하고 있다. 

정책의 내용 못지않게 민간 은행에 정책을 강제하는 양태도 자본주의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는 파격이었다. 폴슨 재무장관은 금융시장 개입 조치를 발표하기 전날인 10월13일 오후 3시 역사적인 회의를 주관했다. 미국 경제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회의를 ‘진실의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골드먼삭스 최고경영자 출신인 폴슨 재무장관은 이날 한때 업계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미국 아홉 개 대형 은행 최고경영자들을 재무부 대회의실에 소집했다. 회의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폴슨 재무장관과 그 오른쪽에 버냉키 의장, 왼쪽에 베어 사장이 앉았고, 반대편에는 아홉 개 은행 최고경영자들이 알파벳 순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날 참석한 은행 관계자들은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세계 금융의 주역들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 뱅크오브뉴욕멜론, 씨티코퍼레이션, 모건스탠리, 골드먼삭스, JP모건체이스, 메릴린치, 스테이트스트리트코퍼레이션, 웰스파고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들이 한곳에 모인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회의 탁자에는 이제 35세밖에 되지 않은 닐 카시가리 재무장관 비서팀장이 ‘전례 없는 속도로 입안한, 전례 없는 (금융시장 개입) 조치’를 담은 문건이 참석자 앞에 하나씩 놓였다. 문건에는 아홉 개 은행에 1천2백50억 달러를 투입해 의결권 없는 우선주를 인수하고 은행 경영진 보수와 배당 정책에 대해 규제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폴슨 재무장관은 아홉 개 은행 최고경영자들에게 해당 문건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협상은 없었다. 참석자들이 세계 최고의 협상 전문가라는 사실이 무색했다. 리처드 코바세비치 웰스파고 회장이 ‘이 조치가 피치 못한 선택인가? 정부가 굳이 은행 지분까지 매입해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다. 섣불리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몰염치한 이로 몰릴 분위기였다. 일본 미쯔비스UFJ그룹에 지분 21%를 90억 달러에 매각해야 할 정도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모건스탠리의 존 맥 회장은 재빨리 서명했다.

▲ 금융 위기로 직격탄을 맞은 뉴욕증권거래소.

10월 첫째 주 서방 선진 7개국 재무장관이 금융 위기 공동 대처를 약속하고, 부시 대통령은 금융시장 안정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를 재천명했으나 시장은 냉담했다. 기관투자자들은 현금 보유량을 늘렸고 은행들은 은행 간 초단기 여신마저 중단했다. 이 와중에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영국 4대 은행(HSBS, 뱅크오브스코틀랜드, 바클레이, 로이드)에 정부 자금을 투입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유럽 각국 정부는 앞다투어 비슷한 조치를 단행해 부분 내지 전체 은행을 국유화했다. 자칫하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미국 은행에 맡기기보다는 정부가 소유하거나 보증하는 유럽 은행으로 자본 대탈출이 일어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폴슨 재무장관은 지난 10월11일 잇달아 대책회의를 열었다. 카시가리 재무장관 비서팀장을 비롯한 실무 담당자는 일요일 아침에 나와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며 저녁 늦게까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연방예금보험공사와 실무 조정 작업을 마친 마지막 안이 일요일 오후 폴슨 재무장관 사무실로 전달되었다. 폴슨 재무장관은 바로 아홉 개 은행 최고경영자에게 월요일 오후 3시 회의에 참석하라고 통보했다. 그 다음 날 회의에 참석한 최고경영자들에 주어진 시간은 3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최고경영자들은 그 사이에 정부 조치를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거부할 지에 대해 숙고하고 이사회에 보고까지 해야 했다. 가벼운 논쟁이 없지 않았지만 최고경영자들은 오후 6시30분에 다시 모여 그 자리에서 서명까지 해야 했다.

구제금융 조치 나오자 월스트리트 향한 비난 ‘봇물’

미국 정부의 금융 위기 대응책을 숨죽이고 고대하던 월스트리트는 환호했다. 정부 대책이 새어나온 10월13일 월요일, 다우존스지수는 11.08%가 치솟아 미국 역사상 다섯 번째이자 1932년 이후 최대 폭의 상승을 기록했다. 은행 간 초단기 여신 금리도 떨어졌다. 자금 순환을 막고 있던 공포감이 누그러지면서 자금이 금융시장에 조심스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은 주식과 자금시장 흐름을 생중계하면서 위기 해결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전세계가 대반전을 환영했으나 미국 국민은 아직도 불신과 냉소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폴슨 재무장관이 금융 위기 대책을 발표한 10월14일 오후 뉴욕 맨해튼 남단에 자리 잡은 뉴욕증권거래소 앞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뉴욕증권거래소, 페더럴홀내셔널메모리얼, JP모건 빌딩으로 둘러싸인 장소에서 짐 코스탄조라는 50대 남자가 몸 앞뒤에 플래카드를 걸고 1인 시위를 벌였다. 코스탄조 씨는 “미국 정부가 납세자의 주머니에서 돈을 갈취해 탐욕의 화신인 월스트리트 사람들을 구하려 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이고 금융 정책인가?”라고 말했다. 35년 동안 월스트리트에서 일한 마이크 모리슨 씨도 “왜 나 같은 평범한 중산층이 ‘똑똑하고 잘난 것 빼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싸놓은 똥을 치우는데 돈을 내야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에 비난을 쏟아내는 부류는 남녀노소, 지역과 계층을 가리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은 “월스트리트는 술에서 깨야 한다. 해괴한 금융 기법이나 수단을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룰라 다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월스트리트를 금융 투기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전세계가 투기 무정부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금융 자본주의에 윤리를 도입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월스트리트에 D학점을 준다. 그는 “(월스트리트가) 온갖 재주를 부려 창안한 새 금융 시스템은 시장에서 실패했다”라고 단정했다.

월스트리트는 지난 30년 동안 새 금융 시스템을 도입해 세계 금융시장을 주도했다. 이제 그 주역들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 리먼브라더스는 사라졌고, 베어스턴스와 메릴린치는 상업 은행에 팔렸다. 골드먼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상업 은행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물론 살아남는다는 것을 전제로). 머니마켓 펀드, 주식 딜러, 헤지 펀드를 비롯한 비은행 금융 기관들을 일컫는 ‘그림자 금융 시스템’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변신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세계 최고의 투자 기관들이 남긴 유산을 청산하느라 공적자금 7천억 달러를 투입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몰렸다.

새 금융 시스템이 월스트리트에서 태동한 것은 30년 전이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지난 몇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규제 완화, 기술 혁신, 국경 간 자본 이동 증가라는 요소가 월스트리트를 웃자라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들 세 가지 요인이 화학적으로 결합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증권화이다. 투자 은행은 고객 자산을 담보로 고객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그 대출 자료를 한데 모아 다시 신용 등급에 따라 분류한다. 재분류해 한데 묶은 담보 자산 (이를 ‘풀(pool)’이라 한다)을 또 담보로 활용해 다시 유가 증권 상품을 만들어 판다. 이렇게 팔린 상품을 담보로 다시 상품이 만들어진다. 이와 같은 증권화 작업이 수차례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기관투자자에게 자금을 추가적으로 빌려 투자 효과를 높인다(이를 ‘레버리지’라고 한다).

65년 경력의 기자도 “지금의 월스트리트는 이해하기 어렵다”

월스트리트는 증권화와 레버리지를 천재적으로 교합해 투자 위험도가 높은(아니, 위험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상품을 만들어냈다. 상품 개발에는 물리학자나 금융공학자를 스카우트해 투입했다. 냉전이 끝나면서 일자리를 잃은 미국 우주항공국(NASA) 출신 물리학자나 수학자, 금융공학 수재들이 월스트리트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자연과학과 산업공학이 이룩한 성과물을 이용해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금융 상품을 만들어냈다. 월스트리트 남쪽 월드파이낸스센터에 있는 투자 은행 RBC에서 일하는 한국인 김선일씨는 “20년 넘게 월스트리트에서 일한 트레이더마저 자기가 무엇을 거래하는지 모르는 해괴한 상품들이 위험의 분산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거래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네이키드 숏셀링(naked short selling)을 예로 들어보자. 다른 이가 보유한 주식을 빌려 시장에 즉시 내다 팔고 나중에 주식 가격이 떨어지면 해당 주식을 매입해서 갚아버리는 숏셀링은 국내 주식시장에서도 볼 수 있는 제도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에서는 주식을 빌리지 않은 상태에서 주식이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주식을 내다 파는 것이 가능했다. 월스트리트 사람들마저도 이 네이키드 숏셀링을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끔찍한 괴물’이라고 비난한다. 리먼브라더스 파산의 주범인 딕 펄먼 전 리먼브라더스 회장마저 네이키드 숏셀링을 회사 파산의 주범으로 꼽았다. 미국 정부가 금융 주식 9백개에 한해 숏셀링을 한시적으로 금지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고참 기자 앤디 서어와 앨론 슬론 에디터는 ‘둘이 합쳐 지난 65년 동안 비즈니스에 대해 기사를 썼지만 지금 월스트리트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해하기 힘들다’라고 고백한다.

지금처럼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파생 상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컴퓨터 탓이다.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대출자와 예금자를 재분류하고 온갖 형태의 투자 위험이 내재한 파생 상품을 거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07년 말 전세계적으로 거래된 파생 상품 총액이 6백조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전세계 국가의 국내총생산 합계보다 11배 가까이 된다. 10년 전만 해도 파생 상품 거래 총액은 75조 달러에 불과했다.

‘정크본드’에 가까운 상품에 최고 등급 준 신용 평가 기관들도 책임

파생 상품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크레디트디폴트스왑(CDS)이라는 상품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쉽게 설명하면, 이 상품은 빌려준 돈이 떼일 것에 대비해 드는 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채권을 산 이가 만기가 되어도 원금을 받지 못할 것에 대비해 투자 은행이나 보험사에게 수수료를 지불하고 CDS 상품에 가입한다. 채권 발행업체가 부도가 나거나 변제 능력이 없게 되면 투자 은행은 채권자에게 투자 원금을 대신 지불한다. 이 상품으로 채권 투자의 위험도가 크게 떨어지니 파생 상품 거래가 활발해졌다.

월스트리트는 이 작업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전세계 자금을 끌어들였다. 수출로 엄청난 달러를 쌓아놓은 아시아 국가나 유가 상승으로 불어난 오일 달러가 월스트리트의 주요 고객으로 자리 잡았다. 천문학적인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 정부는 외국 자본의 유입을 두 손 들고 환영했다. 미국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양대 적자를 외국 자본으로 메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러다 보니 금융시장에 대한 갖가지 규제를 철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월스트리트가 몇 해 전부터 주목하기 시작한 곳이 주택시장이다. 정부가 주택 보급률을 높이고자 부동산 대출과 관련한 규제를 없앴다. 집값은 지난 5년 동안 꾸준히 올랐다. 파생 상품이 창궐할 최적의 조건이 만들어졌다. 은행들은 대출 제한 규정을 크게 낮추었다. 소득이 불분명하고 변제 능력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에게 주택을 담보로 집값의 90%나 되는 돈을 빌려주었다.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상품이다. 월스트리트는 이 담보 대출에 기초해 모기지담보증권(MBS), 채권담보부증권(CBO), 부채담보부증권(CDO) 같은 온갖 변종 상품들을 쏟아내 주택시장에 돈을 공급했다. 부동산시장에 자금이 풍부해지자 집값은 다시 올랐다.
이와 같은 순환 과정이 반복되자 집값이 떨어질 위험은 과소 평가되거나 무시되었다. 그 사이 1986년 가처분소득의 80%에 불과했던 미국 가계 부채는 2007년에는 가처분소득의 1백40%로 치솟았다. 무디스나 스탠더드앤푸어스 같은 신용 평가 기관은 ‘정크본드(고위험부담보채권)’에 가까운 이 상품들에 최고위 등급인 AAA나 AA를 부여했다. 세계적인 신용 평가 기관들이 어떻게 그런 등급이 나오게 되었는지, 무슨 분석 툴로 위험을 평가했는지는 미스터리에 가깝다. 신용 평가 기관에 수수료를 지급하는 고객인 투자 은행의 심사를 알아서 살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그럴 듯하다.

하지만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주택값은 2006년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긴축 정책을 실행하자 주택값이 급락했다. 집값이 대출받은 금액 밑으로 떨어지자 집 주인들이 돈을 갚지 않고 주택을 은행에 넘겨버리기 시작했다. 대재앙의 시발점이었다. 연쇄 반응은 엄청났다. 주택담보대출(모기지)업체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시중 은행도 심하게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자기 자본보다 30배나 많은 자금을 빌려 파생 상품에 투자한 은행들은 자고 나면 하나씩 쓰러졌다. 베어스턴스가 제일 먼저 팔리더니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다. 메릴린치가 팔렸고, 모건스탠리와 골드먼삭스는 투자 은행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하고 상업 은행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세계 1~5위 투자 은행이 한꺼번에 몰락한 것이다. 투자 은행은 사라졌지만 이들이 안고 있는 부실 자산은 각종 유독 물질을 금융시장에 쏟아내고 있다.

월스트리트 사람들, 비난과 실직 공포 속에서 초조한 나날

▲ 7천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 조치가 발표된 뒤에도 주가가 요동치자 증권거래소 직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연합뉴스

금융 산업의 생명은 신용이다. 그 신용이 유독 물질에 질식하려 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세계 금융시장을 쥐고 흔들던 은행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니 투자에 나서는 이가 없어졌다. 고객 예금을 유치해 보수적으로 운영하던 은행마저도 어려워졌다. 은행 사이에 하루짜리 초단기 여신 자금의 흐름도 멈추었다. 개별 금융 기관이나 투자자가 금융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투자를 줄이고 현금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자금이 돌지 않자 시장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구성의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개별적으로는 최선의 행위가 오히려 전체 이익을 해쳤다.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연일 쏟아지는 비난과 실직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하루하루 초조하게 지내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10월까지 월스트리트 은행들은 5만명이 넘는 임직원을 정리 해고했다. 내년까지 추가적으로 5만명 이상이 해고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월가에 추운 겨울이 온 것이다. 존 디바드 <파이낸셜타임스> 뉴욕 주재 칼럼니스트는 “월스트리트가 지나치게 비대해졌다. 내년에 5만명이 넘는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길거리로 쫓겨나와 다른 곳에 이력서를 넣고 다닐 것이다. 불행히도 월스트리트에서 재취업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살아남는 이들도 안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월스트리트 사람들의 본봉은 높지 않다. 신입사원 초봉은 6만 달러가량이다. 10년차 트레이더 연봉도 20만 달러를 넘는 사례가 드물다. 뉴욕 물가가 워낙 높다 보니 본봉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하면 남는 돈이 없다.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상여금이다. 직급이나 업무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연봉의 수십에서, 수백 배까지를 상여금으로 받았다. 1년에 한 번 받는 상여금이 한몫 잡는 기회인 셈이다. 하지만 올해 상여금을 기대하는 월스트리트 사람은 없다. 다만 살아남기만 해도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붕괴 직전의 월스트리트에서 백기사 노릇을 하는 이들이 폴슨 장관, 버냉키 의장, 베어 사장이다. 세 사람은 월스트리트 은행들이 안고 있는 부실 자산을 매입해 은행 부실을 한꺼번에 청산하는 방식에 골몰하고 있다. 삼총사는 이 작업에 의회로부터 위임받은 7천억 달러 가운데 이번 긴급 구제금융 조치로 은행 지분 매입에 투입되는 2천5백억 달러를 제외하고 남은 4천5백억 달러를 쓰고자 한다. 삼총사는 다만 매입 조건과 방식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 부실 자산을 싸게 매입하자니 은행 건전성과 안정성을 높인다는 정책 목표를 거두기 어렵고, 비싸게 매입하자니 납세자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월스트리트는 세 사람의 활약에 기대를 건다.

지원에는 대가가 따른다. 지원 금액이 클수록 치러야 할 대가와 희생이 커지게 마련이다. 금융 규제가 엄격해지고 임직원의 보수나 배당 규정도 까다로워질 전망이다. 금융 위기의 주범으로 지탄받는 지나친 레버리지 행위는 금지될 것이 확실하다. 추가적으로 쓰러지는 은행들이 나올 것이고 일자리를 잃는 이들이 월스트리트를 채울 것이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구제금융과 관련한 하원 청문회에서 “당신이 화나듯이 납세자가 (월스트리트에) 걸려들었다는 것이 화가 난다. 하지만 우리가 수수방관했던 금융 시스템에 납세자들이 낚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증언했다. 차기 대통령 후보들은 앞다투어 월스트리트의 탐욕을 비난하며 금융시장 규제 조치를 강화하겠다고 천명하고 있다. 당분간 월스트리트 사람들 눈에서는 세계 금융을 주도한다는 자부심보다 실직에 대한 공포와 실패에 대한 낭패감을 찾는 것이 쉬울 듯하다. ‘당분간’이라는 말이 맞을지 의문이지만. 


월가 한국인 리서처 “예감 좋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에는 한국인들도 여럿 일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명인 김선일씨(왼쪽 사진)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 가운데 하나인 코넬 대학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월가의 지난 1년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가을 학기가 되면 월스트리트 금융 기관들은 아이비리그(미국 동부 명문대학들)를 돌며 ‘인재 싹쓸이’에 나선다. 김선일씨는 졸업하기도 전인 2006년 하반기에 뱅크오브아메리카로부터 입사를 제의받았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면서 경력만 잘 관리하면 세계 금융의 중심지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입사하자마자 받은 첫 인상은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육 연사로 나온 선배 투자 전문가들은 상승세가 꺾인 채권시장에 대응하느라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했다. 신입사원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시장이 꺾였다는, ‘월스트리트의 내부 진실’이 자연스럽게 공유되었다.

김선일씨는 뱅크오브아메리카 투자 은행(IB) 부문에서 주식 리서처로 발령받았다. 시장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김씨는 입사한 지 6개월도 지나기 전인 2008년 1월 정리 해고를 통보받았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채권시장이 무너져내렸고, 주식시장도 하락하면서 투자 은행 부문에서 경영 압박을 받기 시작한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임직원 25%를 정리 해고했던 것이다. 김선일씨도 그때 부서가 없어지면서 자리를 잃었다.

김씨처럼 올해 초 해고된 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이들은 경기 침체에 상대적으로 잘 대응한 다른 은행이나 펀드에 바로 재취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도 바로 캐나다 금융회사인 RBC에 취업했다. 하지만 지금 회사에서 쫓겨나는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재취업하기 어렵다. 금융 위기 여파로 너무 많은 사람이 시장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 직장 동료들은 이번에 회사에서 나오면 월스트리트에 남아 있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RBC 리서처인 김씨는 기회가 주어지면 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 월스트리트에서는 더 이상 자부심이나 실적에 따른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선일 씨는 “이제 월스트리트는 없다. 최소한 내가 꿈꿨던 그 월스트리트는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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