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갈매기’는 가을이 너무 추웠나
  • 정철우 (이데일리 기자) ()
  • 승인 2008.10.28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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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2008 한국 프로야구 살린 주인공에서 조연으로

▲ 지난 10월11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롯데는 삼성에 4 대 6으로 져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연합뉴스

롯데 자이언츠는 2008 시즌 한국 프로야구의 주인공이었다. 정규 시즌 최종 성적은 3위였지만 뉴스의 중심에는 늘 부산 갈매기가 있었다. 롯데의 홈구장(사직·마산)에서 열리는 경기의 서너 번 중 한 번은 만원 관중으로 가득 찼고 거칠지만 활기 넘치는 야구는 보는 이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롯데는 가을 잔치에 서게 되었다. 물론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3만명이 모여 한목소리를 내는 노래방’이라 불리는 사직구장은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흥겨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주부 대상 아침 방송 프로그램부터 마감 뉴스까지 롯데와 사직구장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팬들의 설레임과 기대치도 그만큼 높아졌다. 2000년 이후 8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묵은 한을 풀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롯데가 2008 포스트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자신했다. 분위기 싸움이 중요한 가을 야구에서 시즌 내내 무서운 기세를 보인 롯데가 전력 이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8년 만에 찾아온 롯데의 가을은 너무 짧고 또 초라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내리 3경기를 내주며 일찌감치 탈락했다.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쓸쓸하게 돌아서는 롯데 선수들의 등 뒤로는 따뜻한 위로보다는 짙은 장탄식이 더해졌다. 그리고 1년 동안 쌓아왔던 영광은 그 그늘만 깊게 드리우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의 가을 야구는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9월16일 대전 한화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최소한 4위 이상을 확정해 포스트시즌에 나서게 된 것이다. 롯데는 이날 샴페인을 터트렸다. 원정 경기 중이었음에도 기분 좋게 지난 1년 동안의 결실을 자축했다.

포스트시즌 나서며 샴페인 터뜨려

그러나 이후 롯데는 크게 휘청거렸다. 9월17일부터 내리 6연패를 기록했다. 잠시 3연승으로 힘을 내는 듯했지만 다시 연패에 빠져버렸다. 결국 4강 확정 이후 4승12패로 추락했다.

일단 첫 목표는 이루었지만 포스트시즌 진출 확정 이후의 부진은 결국, 롯데의 가을 야구에 짐이 되었다. 롯데는 당시만 해도 두산과 2위 싸움을 남겨놓고 있었다. 두산의 페이스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5전3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를 거쳐야 하는 3위와 플레이오프에서 기다리고 있는 2위 중 한국시리즈 우승 가능성이 더 높은 팀이 어디겠느냐는 질문은 이미 뻔히 답이 나와 있는 것이었다.

포스트시즌에 등장한 롯데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장 안정적인 선발 투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는 시작과 함께 허물어졌다. 에이스 손민한의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1차전 선발로 나선 송승준은 2.2이닝 동안 6실점하며 무너졌고, 2차전에 나선 손민한도 5회를 넘기지 못했다. 마지막 경기에 나선 좌완 장원준 역시 4회까지 무려 93개의 공을 던지고 강판되었다.

타선도 좀처럼 터지지 않았다. 1, 2번 테이블세터진이 밥상을 차려놓아도 중심 타선에서 해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상대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들어온 삼성 배터리의 볼 배합에 번번히 막히고 말았다. “포스트시즌도 정규 시즌과 다를 것 없다”던 로이스터 감독의 장담은 허공 속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롯데는 그렇게 일찌감치 가을 잔치 무대를 떠났다.

롯데의 포스트시즌이 막을 내리자 반갑지 않은 소식들이 줄을 이었다. 우선 로이스터 감독이 일찌감치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는 시즌 종료 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11월까지는 강도 높은 마무리 훈련을 하며 내년 시즌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네 상식이다. 로이스터 감독을 뺀 7개 구단 감독들은 하나같이 “가을 마무리 훈련이 스프링 캠프보다 중요하다”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물론 로이스터 감독이 메이저리그 스타일의 운영으로 롯데를 강팀으로 변모시킨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이같은 파격 역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올해 롯데가 그랬듯 상상 이상의 멋진 결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다만 받아들이는 선수들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롯데 선수들이 ‘작은 성공’에 안주하려 할 경우 이 선택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풀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얼마 뒤에는 인사 문제가 불거졌다. 정영기 롯데 2군 감독이 전격적으로 해임되었기 때문이다. 정 전 감독은 올 시즌 롯데 2군을 남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선수들과 많은 대화를 통해 팀을 이끌어 신망, 특히 팬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정 전 감독이 해임되자 팬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학연·지연 등에 기댄 인사를 한다는 의심을 갖고 있던 차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팬들은 “롯데가 최악의 부진을 겪을 때도 몇몇 코치들은 튼실히 자기 자리를 지켰는데 2군에서 성과를 거둔 정 전 감독을 해임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롯데가 정규 시즌 2위였다면 어땠을까

▲ 롯데 손민한 투수(맨 왼쪽)가 만루 위기에서 교체되고 있다. ⓒ연합뉴스

팬들의 반발이 정 전 감독의 인사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구단 역시 “인사 원칙에 따른 결정일 뿐”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결정에 대한 결과가 좋지 못할 경우 구단과 팬들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는 불씨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제리 로이스터 롯데 감독은 준플레이오프 내내 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우리 야구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다수 선수가 1점 뽑기도 버거운 타격감에 허덕였지만 좀처럼 희생 번트를 대려하지 않았다.

‘롯데 야구’를 하지 않으면 눈앞의 1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최종 목표가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면 더욱 그렇다는 것이 로이스터 감독의 판단이었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달려들며 상대를 허물어뜨리는 매서운 공격력. 2008 시즌 롯데를 가을 잔치로 이끈 바로 그 힘을 기다렸던 것이다.

롯데는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 대 2로 뒤진 5회 박기혁·이인구·조성환이 4연속 안타를 때려내며 2점을 뽑아 역전에 성공했다. 특히 김주찬부터 조성환까지 3명 모두 초구를 노려 쳐 좋은 타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다. 결국 롯데는 삼성에 역전을 허용하며 준플레이오프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롯데는 1차전보다는 2차전에서, 2차전보다는 3차전에서 훨씬 좋은 모습을 보였다. 준플레이오프 내내 롯데를 짓눌렀던 부담과 경험 미숙을 한꺼풀씩 벗어던진 느낌이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만약 롯데가 정규 시즌 2위였다면? 어쩌면 2008년 야구의 역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특히 두산과 시즌 마지막 3연전이 아쉬웠다. 3연전을 앞두고 반 경기 앞서 있던 롯데는 두산에 내리 세 번을 패하며 2위 등극이 사실상 무산되었다. 만에 하나 롯데가 최소 2승1패를 거두었다면 롯데는 2위를 차지해 플레이오프에 직행할 수 있었다. 물론 플레이오프도 처음 경험하는 선수들이 대다수였지만 2위가 가질 수 있는 자신감과 7전4선승제라는 여유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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