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노래는 모두 한 호흡으로 간다”
  • 김진령·반도헌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08.11.04 03:1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리꾼 장사익이 여섯 번째 앨범을 내고 무대에 선다. 그는, 대우를 못 받는 인생들이 가는 길 한 번 폼 잡고 가듯이 그런 기분과 의미를 가을에 한 번 생각해보자고 앨범 제목을 <꽃구경>으로 지었다고 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소리꾼 장사익이 여섯 번째 앨범 <꽃구경>을 내고 전국 투어 및 미국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첫 공연은 11월8~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연다. 공연을 보름여 앞두고 표는 벌써 매진되었다고 한다. 한창 공연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났다.

겨울에 꽃구경이라니, 무슨 뜻인가?

동짓달, 서릿발 내릴 때, 눈내릴 때 가는 꽃구경, 역설적인 이야기이다. 꽃구경이라는 의미가 꽃상여라는 의미와 이어진다. 대우를 못 받는 인생들이 가는 길 한 번 폼 잡고 가듯이 역설적이지만 그런 기분과 의미를 가을에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동안 앨범을 6집까지 냈는데 그중 3분의 1인 9곡이 죽음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사는 가치를 잘 모른다. 깜깜하면 밝은 곳을 원하고 추우면 따뜻함을 갈구하듯이 우리가 죽음을 알면 하루하루 사는 가치를 알지 않겠나.

죽음이 부담스럽지 않은 듯하다.

천상병 시인은 ‘신나게 놀다가는 거지’라고 했고, 어떤 환경운동가는 ‘잘 놀았다, 안녕’이라고 말했다. 두렵지만 모두 하루 인생을 다 살고 있지 않나.

부모님은 돌아가셨는가?

두 분 모두 무학이신데 나를 제대로 키웠다. 나는 7남매 중 장남이지만 막내처럼 살았다. 아버지는 노래로 조금 빛 볼 때인 1998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2년 더 사셨다. 아버지 생전에 내가 늘 ‘막내같이’ 헛갈리게 살았어도 아버지는 아들이 온다고 하면 광천역에 한 시간 전부터 나와 자전거를 받치고 기다리셨다. 집을 떠날 때는 올려보낼 먹을거리를 싸들고 먼저 역에 가서 기다리셨다. 별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광천역에 내리니 휑하고 눈물이 나더라. 고향은 부모가 있어야 고향이지.  

지금은 많이 이룬 인생인데 언제가 가장 어려웠나?

노래를 하기 전의 사진을 보면 죄다 찡그리고 있다. 46세에 노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25년 동안 15개의 직장을 바꿔 다니며 헛갈리게 살았다.

노래하기 전에는 무엇을 했나?

충남 광천에서 중학교를 나와 선린상고로 유학을 왔다. 야구 선수 김우열이 동기이다. 고교를 졸업한 뒤에 고려생명에 입사해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그때 낙원동 악기상가의 노래학원을 다니며 노래를 배웠다. 군대도 문선대로 다녀오고.

<찔레꽃>이 본인의 이야기라고 하던데.

45세 되던 해인 1993년도인가, 3년간 ‘죽을 힘을 다해 음악을 해보자’라는 결심을 했다. 그때 잠실 주공5단지에 살았는데 5월께인가 버스 타러 가는데 어디선가 향기가 나더라. 장미가 만개했지만 그것은 장미향이 아니었다. 그 향기를 따라가니 하얀 찔레꽃이 숨어 있더라. ‘이게 나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확 났다.

국악은 어떻게 접하게 되었나.

어릴 때 아버지가 마을 잔치에서 장구를 치셨을 때 옆에서 아저씨의 태평소 부는 소리가 가슴에 남았다. 이후 1980년대에 서울에서 생활 하면서 아마추어 국악단체에서 단소도 배우고 대금도 배웠다. 나도 모르게 노래라는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하나씩 쌓았던 것 같다. 웅변 배우고, 노래 배우고, 군대 가서 노래하고, 사회 생활에서 얻어터지고, 국악 배우고…. 사회에서는 뽕짝도 제법 한다고 생각했는데 문선대에 가보니 1년 선배가 나보다 더 나훈아 노래를 잘 하더라. 그때부터 조영남과 이용복, 신중현 노래로 레퍼토리를 바꿨다.

이광수가 주도하던 사물놀이단 노름마치에서 새납(태평소)을 불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노래가 아니라 새납에 목숨을 걸었다. 사물놀이에도 쓰이고 농악에서도 쓰이니 새납을 하면 밥은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음반은 어떻게 내게 되었나?

그때 농악 공연을 하고 뒤풀이에 가면 내가 노름마치였다. 마지막 판의 주인공으로 내가 노래 한 자락 불러야 판이 끝났다. 임동창(피아니스트)이 이를 알고는 무조건 나가라고 그래서 홍대 앞 예극장 무대에 섰다. 그것이 1994년 11월. 그 무대에 서면서 ‘행복’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내가 이래서 세상에 나온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와서 보면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밥 먹고 가정 이루고, 그렇게 누구나 다 하는 것 말고 그 이상의 세상에 나온 이유가 있다. 풀이나 꽃, 나무는 세상에 향기를 주고 사람에게 감명을 준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는 것이 얼마나 멋있나.

장사익의 노래는 어떤 장르인가?

나는 한 번도 민요나 국악을 부른 적이 없다. 그것은 제대로 해야 하니까. 국악 반주로 노래를 하는 것뿐이다. 장르는 상관없다. 국악가요든 뭐든 정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장사익표 노래가 재즈 드럼 연주자 김대환씨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던데.

내가 지금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인 공연을 일곱 번 했는데 그중 세 번째 공연이 그 형님과 함께한 것이었다. 그때 인사동의 형님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다가 <산토끼>를 불렀다. 그 노래를 듣던 형님이 “지금 속으로 박자 세고 있지 않냐, 박자를 벗고 불러봐라”라고 그러시더라. 그때 깨달았다. 내 노래 <찔레꽃>도 박자가 없다. 모든 노래가 다 한 호흡으로 간다. 그날그날 공연에 따라 노래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김대환 선생은 박자 맞추는 것이 본연의 직업이다.

그분은 박자를 안 맞춘다. ‘김대환식’ 박자를 정립했다. 요즘 퓨젼 국악을 하는 원일이나 박재천이 시작한 작업도 다 형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박자도 아닌 박자인데 기막히거든, 원 박자! 한 박자 정박으로 가면 어떤 음악이든 맞출 수 있다. 치고 싶을 때 치고 안 치고 싶을 때 안 치고 자유스럽지. 그것이 세상의 어떤 음악하고도 맞아떨어진다.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박자 같지도 않은데 기막히다. 그것이 새로운 창조이다. 나는 <동백 아가씨>를 부를 때도 ‘해일 수 없이~’ 이렇게 안 부른다. ‘해’자 하나에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담는다. 꽉 채우는 것이지, 느리면 심심하다고 하는데 그게 꽉 차는 것이다.

협연할 때는 그래도 박자는 맞추어야 하지 않나?

마음만 맞추면 박자는 얼마든 맞출 수 있다. 내가 하는 대로 쫓아오면 된다. 무반주로도 할 수 있다. <찔레꽃>도 코드만 눌러주는 것이다. 임동창도 그랬다. 부부나 친구가 가다보면 손 붙잡고 갈 때도, 혼자 갈 때도, 뒤쳐져 갈 때도 있는 것이다.

레퍼토리에 트로트가 많은데 사람들이 트로트를 이중적으로 대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를 마음속에 거부하는 것 때문에 그렇지 트로트는 이미 우리 몸에 체질화되었다. 그런데 트로트도 사실 일본 고유의 것은 아니다. <부베의 연인>도 트로트이다. 가요가 일제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뿌리가 거기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새 노래 <이게 아닌데>는 처음에 뽕짝으로 시작한다. 뽕짝을 업그레이드시켜보자는 생각에 가사도 아름다운 시에서 골랐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